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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 죽이기 11

by 이건해

#11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성공했습니다. 양 팀장의 범죄 정황을 확보했습니다.”

회사 근처는 어디든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에 몇 정거장 떨어진 지역에서 만난 정원은 지극히 담담히 말했다. 그가 꺼낸 태블릿 화면에는 모델링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예선의 디지털 캐릭터가 표시되어 있었다.

예선은 자기 모습을 3인칭으로 보면서 평범한 사진이나 영상을 볼 때와 전혀 다른 불쾌감을 느꼈다. 마치 술에 취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자기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모델링으로 뭘 했는지도 알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저속한 영상을 제작했다든가…….”

“모델링 데이터를 시뮬레이션에서 로드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과 삭제된 로그까지 모두 복제해왔으니 원하시면 재현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심리적으로 상당히 좋지 않을 수 있겠죠.”

정원의 경고에 예선은 물러서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제 이런 무섭고 더러운 일에서 벗어나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타협안으로 정원에게 대신 보고 내용을 알려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주 매혹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건 비겁한 짓 같았다. 자기의 고통을 왜 남에게 대신 맛봐달라고 부탁한단 말인가. 게다가 정원은 이번 일을 도와주기로 하긴 했지만 분명 생판 남이었다.

예선은 두려운 선택 앞에서 정원을 보았다. 그는 무엇을 권하지도 종용하지도 않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예선은 그 모습을 보자니 정원이라면 영상을 같이 확인하다가도 심한 문제가 있으면 알아서 멈추거나 비켜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어째서인지 인간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도덕이나 윤리 자체에 대한 믿음에 가까웠다.

“일단 같이 확인하죠.”

예선의 말에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곧바로 복구된 로그가 디지털 정예선이 어떤 환경에서 무슨 동작을 했는지, 누굴 보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여주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추악하며 저속한 꼬락서니를 각오했던 예선은 그 결과물을 보고 당황했다. 디지털 정예선이 하는 일은 지극히 단순한 일상생활에 불과했다. 회사를 다니고 주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걸어다니는 평범한 일상. 양 팀장과 비슷한 인물에게 부정적 피드백을 받는다는 대목이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그것이 은밀한 욕망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떤 방향으로 머리를 굴려봐도 가능하지 않았다.

“혹시 진짜 끔찍한 건 데이터를 옮겨서 개인 컴퓨터로 한 게 아닐까요? 그 편이 안전하고…….”

당장 떠오른 가설을 물었지만 정원은 고개를 저었다.

“데이터 입출력 로그에는 그런 내역이 없었습니다. 보안상 우회할 방법도 존재하지 않으니 지금 보는 것이 전부가 맞습니다. 따라서 양 팀장이 원했던 것은 예선 씨의 외양과 생활 양상을 마음대로 구현 가능한 형태로 확보하는 것이었거나, 더 나은 지배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시뮬레이션 데이터 확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어느쪽이든 이해하기 어렵고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합성 음란물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선은 시뮬레이션을 반복 수행하며 화면 너머의 자신을 3인칭으로 응시했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특이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예선이 부정적 피드백을 받고 자리로 돌아가는 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해 유독 길고 반복적이었다. 다른 행동의 평균 길이와 비교하면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예선이 양 팀장에게 충고나 잔소리나 호통을 듣고 움츠러들어 자리로 돌아가는 일상적 광경이 집요하게 되풀이된 이유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지만,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직감적으로도 불쾌감이 감돌았다.

“이 부분은 왜 굳이 이렇게 길게 여러 번 수행했을까요?”

예선이 지적한 로그를 다시 살펴본 정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선 씨가 혼나는 모습을 보는 게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죠.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한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다시없는 보상이 된다.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가상 현실을 통해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할 정도로 짜릿하고 황홀한 보상이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예선은 자신의 세계를 떠받치는 모든 가치관이 모조리 무너지는 듯했지만, 받아들이지 않고는 싸울 수도 없었다.

예선은 화면 속에서 주눅든 자신의 뒷모습을 응시하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했다.

“이 증거로 제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까요?”

“당사자의 허가 없는 인체 및 인격 디지털화는 불법 촬영의 몇 배로 심각한 범죄입니다. 업무를 핑계로 부하직원의 데이터를 알아내서 개인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리 대단한 연줄을 이용해도 버티기 힘들 겁니다.”

앞으로 남은 길은 더 험할 테고, 말처럼 쉽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선은 이 더러운 기분을 더이상 견디고 싶지 않았다.

“신고, 소송……힘든 일이 많겠죠?”

“양 팀장은 주도면밀하고 인맥이 넓은 사람입니다. 부모가 다 법조계 출신이라는 것도 잘 알려져 있죠. 재산까지 충분하니 아무리 각오가 단단해도 대단히 불리할 겁니다.”

절망적인 기분이 빠르게 온몸으로 스미는 듯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자 정원은 전에 없이 길게 생각하더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법적인 싸움 대신 근원적인 부분에서 전의를 꺾어놓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소 위험하고 금전적인 보상은 없지만……”

“그게 뭐죠?”

예선은 정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었다.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다른 보상 따위는 아무것도 필요도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양 팀장은 또다시 인생 처음으로 맛보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가히 우주의 붕괴나 지옥의 태동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 양 팀장은 일찍이 이 정도로 강렬한 혼돈과 고통을 맛본 일이 없었다.

정예선이 나에게 반기를 들었다.

아니, 그냥 반기를 들고 사소한 저항에 나선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양 팀장은 오로지 자기만이 존재하는 방안의 검은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계획대로라면 전혀 다르게 흘러가야 했다. 예선은 양 팀장의 제안을 일단 거부한다. 그러나 경험과 성장은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한계선을 넘어서는, 자기자신을 죽이는 고난의 극복 없이 불가능한 것이며, 그 극복을 안전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할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양 팀장의 설득에 감복하여 촬영에 응해야 했다. 그게 정상적인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그렇게 되긴커녕, 예선은 아예 그동안 양 팀장이 공들여 짜놓은 틀 전체를 문제시하고 양 팀장을 죽이기에 나섰다.

이번 수가 그렇게나 틀렸던 것일까? 양 팀장은 회한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예선의 말대로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저속한 본성이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예선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믿게 되자마자 유전자 보존이라는 저열한 본성이 고개를 들고 예선의 맨살을 갈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더러운 본성은 수행을 거듭 쌓은 성직자들조차 극복하기 어려워하는 것이니까.

굴욕감을 주는 데에 의상을 쓸 게 아니라 어려운 연기부터 시켰어야 했다. 연기에는 미리 보고 꺼릴만한 형체가 없으니 발을 빼기 힘든 상황으로 몰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의상이 정 필요했다면 그 뒤로 미뤘어도 될 것이다. 결코 서두를 일이 아니었다. 인사팀장에게 연락해서 사이가 안 좋은 직원이 무리한 신고를 할지도 모르니 시스템도 좀 점검하고 여차하면 잘 타일러달라고 부탁한 뒤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놓고 기고만장한 모양이다.

양 팀장은 눈에 보이는 것을 모두 박살내고 불사르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책상을 심하게 두드리는 정도로 분풀이를 그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단련된 이성의 힘만이 욕망을 억누르고 역경을 이길 수 있다.

예선이 틀을 깨고 삿된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분명 외력이 작용했다. 틀 안에 있는 사람은 틀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외력이란 무엇인가. 예선과 언쟁을 벌일 때에는 화가 치밀어 되는대로 떠들었지만, 그때 쏟아낸 말이 정답일 것이었다.

박정원 그 반병신 새끼가 예선과 말을 섞고 친해지더니 독사같이 사악하고 더럽고 추악한 생각을 흘려넣어 나를 적대시하고 저를 추앙하게 조종한 것이다. 아내도 잃고 대가리도 박살나서 따를 여자가 없으니 만만한 예선을 구슬려 은인이 된 시늉을 하고 제것으로 만들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양 팀장은 모든 게 완벽했던 세계에 불을 싸지른 정원과 그에게 멍청하게 홀려버린 예선을 생각할수록 분노에 사로잡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이 쌓아올린 불안과 고통을 이용해서 영향력을 공고히 만들었을 정원의 독언과 예선에게 건네었을 저급한 디저트, 그리고 거기에 넘어가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꾼 예선을 생각했고, 어쩌면 이미 형성되었을 의존 관계가 진창처럼 더럽고 끈적대는 침대 위에서 매일 갱신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그 더럽고 추잡한 망상에 양 팀장은 심장을 꺼내어 짓씹고 싶었다. 그게 누구의 것이 되었든.

온몸을 살라먹는 분노의 고통 속에서 양 팀장은 스마트폰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따로 설정해놓은 알림음만으로 예선의 메시지임을 알 수 있었다. 양 팀장은 그 순간 마음이 다소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항상 말을 잘 듣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예선이라면 뒤늦게라도 사과했을 게 틀림없었다. 다소 요령은 부족하지만 근본은 선량하고 그를 진정한 멘토로 여겨왔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양 팀장은 스마트폰을 집어들기 전에 자신이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진심어린 사과가 맞다면 박정원을 회사에서 매장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사과가 아니라면…….

양 팀장은 서랍에서 전기 충격기를 꺼내어 책상 위에 놓은 다음, 신중한 동작으로 스마트폰을 집어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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