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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 죽이기 10

by 이건해

#10


“예선 씨, 오늘 아홉 시에 나 좀 볼까요?”

양 팀장의 호출에 예선은 거의 심장이 멎을 만큼 긴장했다. 누가 죽었다는 핑계라도 대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때보다 강하게 맞서지 않으면 자신을 구하는 계획이 수행될 수 없었다.

예선은 곧바로 그러자고 하려다,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이면 큰일이라 경계하는 기색을 띠었다.

“또 무슨 작업을 해야 하나요?”

“대단한 일은 아니고, 음성이랑 의상 데이터를 좀 따야 할 것 같아서요. 전에 한 게 잘 돼서 부탁하는 건데 괜찮죠?”

예선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앞이 어두워졌다. 그냥 시험용으로 쓰겠다기에는 과도한 개인 정보였다. 양 팀장은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이러다 마지막에는 영혼까지 내놓으라고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양 팀장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에 압도되지는 않았다.

예선은 전에 없이 날카롭게 물었다.

“절 디지털로 똑같이 만들려고 하세요?”

그 말에 양 팀장 역시 전에 없이 크게 웃었다. 입을 막으면서까지 웃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유심히 양 팀장을 주시한 예선은 그 웃음이 동요를 숨기기 위한 것임을 알아보았다. 그녀가 처음으로 명백히 알아본 첫 번째 동요였다.

당황하는 법을 더 배우게 해드릴게요. 예선은 마음속에서 자신의 자세가 변하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왜 웃으세요?”

“아니, 좀 웃기잖아요, 예선 씨가, 이렇게 말하면 미안하지만, 디지털화해서 반드시 보존해야할 만큼 엄청난 절세 미인이나 세기의 위인은 아니니까. 아무튼 편치 않은 기록을 남기는 느낌이 들었다면 사과하죠. 이번 일도 일반적인 사람의 시험용 데이터를 모으려는 거니까 안심해도 돼요.”

양 팀장은 아주 여유롭게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그래도 싫다면 뭐, 억지로 시킬 수는 없는 거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애초에 하겠다는 선택지밖에 남아있지 않았지만 예선은 그런 생각을 했다. 양 팀장은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다른 지원자를 찾을지도 모른다. 당장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으니 다시 기세를 꺾어놓으려 할 것이다. 곧 예선이 견디기 힘든 수준의 업무를 마구잡이로 떠넘길 테고, 압박을 이기지 못해서 미치기 직전이 되면 살살 달래서 다시 수상한 짓을 시킬 것이다.

그런 미래를 떠올린 예선은 인간 감정의 모든 것이 다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쥐어짜서 뭔가를 얻어내게 만드는 감정도,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 모두를 두려워하며 고통받게 만드는 감정도 다 추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짐작할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는 고통은 그나마 덜 고통스러웠다.

예선은 고통에서 반걸음 떨어진 자신을 깨닫고 담담히 대답했다.

“아홉 시에 스튜디오로 가겠습니다.”


아홉 시부터 일어날 일도 심란했지만 아홉 시까지 기다리기는 것도 만만치 않게 힘들고 고역스러웠다. 정원과 계획을 다시 맞춰 보면 좀 마음이 놓일 것 같았으나 만일을 대비해서 연락은 엄금이었다. 예선은 인공지능에게 가르칠 사랑의 표현들을 정리하고 입력하며 시간을 견뎠다. 견뎠다기보다는 작업에 두들겨 맞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 시간동안 봐야 했던 오만가지 멋진 말과 행동은 모두 허구 속에나 존재하는 구체화된 망상의 언동, 혹은 유럽의 뺨키스처럼 전혀 다른 문화의 풍습처럼 느껴져서, 그렇게 무엇 하나 와닿는 구석 없는 습속을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인공 지성체에게 가르치는 작업은 본인도 믿지 않는 종교의 진리와 계율을 가르치는 것 같았다.

예선은 자기가 가르친 인공지능이 사랑에 대해 묻는다면 무슨 표정으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할 것인가 생각했다. 답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인간이가르친다는 발상 자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천진하게 허를 찔러서 상식의 핵심이나 진리를 다시 살펴보게 하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인공지능에게서 사랑의 의미와 사랑의 습속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아홉 시가 되자 예선은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챙겨 스튜디오로 갔다. 걷는 동안 표정을 감추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마스크를 썼다가, 자신이 품은 분노는 진짜이니 감출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벗어버렸다. 얼굴을, 표정을 너무 오랫동안 감춰온 것인지도 모른다. 예선은 그게 끔찍한 일이었음을 새삼 생각했다.

이윽고 예선은 스튜디오 앞에 도착했다. 입구로 통하는 복도 바로 옆에는 커피 따위를 마시며 잠시 쉴 수 있게 놓은 테이블과 자판기가 있었는데, 자판기 옆 구석진 그늘에 큼지막한 음료수 박스 하나가 예정대로 놓여 있었다. 원래 그런 게 놓이는 자리라 신경 쓰고 보지 않으면 전혀 눈에 띄지 않는 박스였다. 물론 그 안에는 정원이 숨어있었다. 예선은 빠르게 시선을 거두고 심호흡을 한 뒤에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스튜디오에는 역시나 양 팀장이 혼자 있었다. 자리에는 마이크가 세팅되어 있었고, 촬영용 스크린 근처에는 옷걸이가 놓여 있었다. 옷걸이에는 각양각색의 옷들이 가득 걸려 있었는데, 그것들은 대개 일상복이 아니라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에나 나오는 캐릭터들이 입는 가상의 망측한 것들이었다.

예선은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바퀴벌레 따위를 실제로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두려움이었다. 동시에 경멸감도 치솟았다. 그동안은 양 팀장이 품은 욕망이 미지의 영역에 있다고만 여겼다. 그것이 아무리 이상하다 해도 평범한, 보편적인 성욕과는 거리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원하는 것에도 여자에게 면적 좁은 옷을 입혀 맨살을 구경한다는 뻔한 일이 포함되어 있다니, 더이상 경멸을 보류할 이유가 없었다.

“어서 와요. 시간이 없으니 빨리 시작하죠.”

양 팀장이 돌아보며 아주 매끄럽게 말했다. 설명도 없이 당장 하자면 뭐든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였다. 예선은 기가 차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뭐해요? 빨리 들어오지 않고.”

예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걸어간 곳은 양 팀장 옆이 아니라 옷걸이 옆이었다. 예선이 돌아보자 양 팀장은 슬쩍 웃었다. 뱀이 날름거리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표정을 보니까 무슨 얼토당토 않은 짐작을 한 것 같은데, 난 그런 거 안 합니다. 그런 데에 관심 없어요.”

“그럼 이건 어디에 관심이 있어서 준비하신 거죠?”

예선이 날을 세우자 양 팀장은 짧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허를 찔리거나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표정. 그 표정은 이윽고 분노의 표정으로 교체되었다. 보여선 안 될 물건을 장막으로 덮어버리듯이.

“모델링에 필요해서 준비했지 왜 준비했겠어요? 예선 씨, 정신 차려요, 일 안 할 거야?”

“일이라면 해야죠. 근데 이걸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팀장님이 ‘그런 거’에는 관심 없다고 하든말든 제가 저것들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야 한다는 건 똑같잖아요?”

예선은 오늘 양 팀장을 들이받는다는 결심을 하고도 내내 두려웠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요점을 미리 정리해두기까지 했다. 그런데 의상들을 보고 나자 두려움은 모두 깨끗이 증발해버렸고, 분노와 증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준비했던 말들 역시 어디론가 쓸려가고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벼려진 칼날들이 솟구치는 듯했다.

예선은 입을 약간 벌린 채 답을 하지 못하는 양 팀장을 찌를 듯이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한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요, 일상적인 범위이긴 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간단한 움직임을 굳이 다시 모델링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굳이 모델링 모델 경험이 있는 사람들 놔두고 제가 이용돼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제는 저 거지발싸개 같은 옷들을 입고 카메라 앞에 나가라고요? 그럼 다음엔 뭔데요? 케이팝 댄스라도 따라할까요? 그 다음엔 스트립 댄스라도 춰요? 무슨 짓을 해도 신경 쓸 사람 하나 없는 스튜디오에서?”

양 팀장은 말없이 조용했다. 예선은 그가 자신을 노려보며 무슨 수를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상관없었다. 예선은 양 팀장의 뱀같은 시선을 받아치며 옷걸이를 세차게 떠밀고 걸어나갔다.

“아닌척하면서 은근슬쩍 쓰레기 같은 짓 좀 작작 하세요. 얼어죽을 모델링이 필요하면 직접 입고 찍으시든가.”

예선이 천천히 스튜디오 바깥쪽으로 걸어나가자, 양 팀장이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언쟁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는 알 수 없지만, 계획은 반쯤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선 씨,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억지로 하라고 했어요? 내가 강요했냐고요. 말해봐요.”

예선은 쫓아오는 목소리에 답하지 않고 스튜디오를 나섰다. 도망치는 것 같지도 않고 따라오게 만드는 것 같지도 않은 속도로 걷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예선 씨, 진짜 이렇게 할 거야?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예선 씨, 예선 씨!”

예선은 답하지 않고 걸어서 스튜디오 앞의 휴게 공간을 지나 모퉁이를 돌았다. 정원이 스튜디오에 숨어들어가는 모습을 들키지 않을 안전지대였다. 양 팀장이 걷는 소리 너머로 정원이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편 잰걸음으로 다가온 양 팀장이 예선의 손목을 붙잡았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부딪히더라도 대화를 해서 결론을 내야지, 이런 식으로 도망친다고 나아지는 게 있을 것 같아요?”

예선은 이 상황이 소름끼치게 넌더리나서 양 팀장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무슨 드라마 속에서 오해로 토라진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으로부터 멀어지려는 갈등의 장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뺨을 때린다는 반격조차 그런 드라마적 상황의 화룡점정인 것 같아 상상도 그만두어야 했다.

예선은 돌아서서 웃었다. 화가 나거나 억울해도 울지 않는 메마른 감성이 몹시 다행이었다.

“놓으세요. 성추행으로 신고하러 가야 하니까.”

양 팀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그는 망설이다 예선을 놓아주었다.

“얼토당토 않은 소리 그만하고 진정 좀 해요. 당황스러울 수 있었다는 건 이해하니까. 하지만 강제로 하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뭐가 그렇게까지 문제라 그러는 거예요? 예선 씨답지 않게.”

마치 예선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말이었다. 예선은 양 팀장이 그녀를 정말로 자기 손바닥 위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았다. 그게 아마 사실이었을 테고.

“잘 생각해보니까 절 아주 갖고 놀고 계셨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일을 던져줘서 엉망진창으로 지치게 만들고, 거기서 아슬아슬하게 끄집어냈다가 다시 집어던지고. 팀장님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는 개처럼 조련하셨잖아요. 강제가 아니라고는 했지만 제가 거절하면 다른 누구를 괴롭히는 꼴을 보여주거나 또 말도 안 되는 데이터 정리 같은 걸 시켜서 다음에 시키는 건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겠죠. 이런 걸 고문이나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해요, 보통. 그리고 강제적 방법으로 성적 불쾌감을 유발하는 행위를 요구하는 걸 성추행이라고 하고요.”

죄목까지 읊어주자 이제 양 팀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나를 아주 엿먹이려고 작정을 하고 칼을 갈았네. 예선 씨가 말도 잘 통하고 크게 성장할 소질도 보여서 배려해줬는데 그런 식으로 받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기본적인 데이터부터 이해해야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어서 훈련시켜주고, 그게 너무 힘들어 보여서 일 빼주고, 모델링 과정의 일부도 체험시켜줬는데, 그걸 갖다 가지고 놀고 성추행까지 했다고 뒤집어씌우겠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선택을 강요했다고 하는데, 그 근거라는 게 죄다 끼워맞춘 혼자만의 망상에 불과하잖아? 왜 그러는 거예요, 대체?”

양 팀장은 한참 쏘아대더니 스스로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혼자만의 망상이 아닐 수도 있겠네. 박정원, 그 새… 그 작자가 한 말에 넘어간 거죠? 원래 남의 말에 잘 휩쓸리는 편이니까. 예선 씨. 그거 이용당하는 건데 그것도 몰라요? 그 새끼가 지금 예선 씨를 조종해서 날 찍어내려고 하는 거라고!”

예선은 양 팀장이 정원을 생각해낸 탓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그가 늘어놓은 망상에 어이가 없어졌다.

“팀장님이야말로 망상이 참 과하시네요. 팀장님이 망한다고 해서 박정원 주임이 얻을 게 뭐가 있는데요?”

양 팀장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삭이듯이 숨을 길게 내쉬곤 짓씹듯이 말했다.

“내가 예선 씨랑 좀 가까워 보이니까 질투하는 거죠. 뭐가 있겠어요.”

예선은 이제 어이가 없는 정도를 넘어 머리로 피가 몰리는듯했다.

“박 주임이 절 좋아한다 이 말이죠? 무슨 근거로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셨어요?”

“멍청한 생각? 하핫, 예선 씨, 무례한 건 일단 넘어가 줄게요. 지금은 멀쩡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으니까. 하지만 사람 접해본 경험이 적어서 모르는 모양인데, 남자는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와 두어 마디라도 나눈 호감 가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말을 섞는 꼴을 보면 자기가 유전자 보존에 완전히 실패하기 직전에 놓인 것처럼 위기감을 느끼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게 합리적이든 아니든 그런 위기감을 민감하게 느낀 자들이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자연히 그렇게 되어 먹은 거죠. 인간은, 남자는 그렇게 추악한 존재라고요. 박정원 그 작자도 다를 거 하나 없어요. 머리를 뜯어고친 반편이든 아니든 결국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먹이나 갖다바치고 번식이나 하려는, 이성과 동떨어진 욕망의 노예라고!”

양 팀장이 한 맺힌 사람처럼 열변을 토했지만, 예선은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복도 저편 스튜디오 쪽에서 희미하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정원이 스튜디오에서 나와서 다시 숨으러 가는 소리다. 그가 스튜디오로 들어갈 때는 예선과 양 팀장도 걷고 있었으므로 들키지 않았지만 둘 다 서 있고 정원이 가까워지는 지금은 위험했다.

예선은 더는 못들어주겠다는 듯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예선 씨!”

예선은 걸음을 크게 해서 또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3미터쯤 가자 양 팀장이 다시 손목을 붙잡았다. 예선은 양 팀장의 손가락 사이로 힘껏 팔을 당겨 빼며 다시 돌아섰다.

“제가 박 주임과 잠깐 같이 있었던 것뿐인데 그걸 근거로 질투라는둥 유전자 전달이라는둥 온갖 소리를 다 늘어놓는 거야말로 망상 장애의 영역이죠. 세상이 그렇게까지 천박하지 않아요. 진짜 천박한 건 제대로 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매도하고, 필요한 작업이자 배려라는 명목으로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로 부하 직원을 불러서 반쯤 벗은 꼴을 하라고 권유하고, 걸어가는 사람 손목을 낚아채서 멈춰세우는 사람이겠죠.”

양 팀장은 사고가 잠시 정지한 듯, 입을 살짝 벌린 채 말하지 못했다. 예선은 심장에 말뚝을 박는 기세로 덧붙였다.

“각오하고 계세요, 인사팀에 신고할 테니까.”

양 팀장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영혼에 금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표정은 이내 매섭고 표독한 것으로 변했다.

“이봐, 예선 씨, 속상한 건 알겠는데 이건 너무 과하잖아. 어차피 요즘은 기분 좀 나쁘다고 신고하는 여자들이 하도 많아서 이런 건 대충 얘기 들어보고 화해하라고 한다고. 예선 씨 이미지만 버리는 거예요. 잠깐 스트레스 해소하자고 이런 식으로 해서 좋아질 거 하나 없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예선 씨 이런 사람 아니잖아? 이것도 그 자식이 시킨 거지?”

예선은 양 팀장이 지껄이는 소리를 들어주기도 괴로웠을뿐더러 정원이 다시 숨을 시간을 가늠하느라 실상 듣고 있지도 않았다. 서른 걸음 걸을 시간에 10초를 더한 시간. 이만하면 분명 충분하리라.

예선은 마지막으로 양 팀장의 폐부를 찌를 비수 같은 말을 떠올리다가, 굳이 그렇게 공들여 상처까지 만들어줄 이유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걷는 속도를 높였다. 양 팀장이 따라오는 소리는 이내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에 들려오는 것은 예선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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