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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 죽이기 08

by 이건해

#8


모델링 스캔은 약 15분만에 빠르게 끝났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예선의 걱정과 달리 망측한 자세, 괴이한 행동을 하진 않았다. 부착형 마커를 몇 개 달았을뿐, 일상적인 모습처럼 걸어다니고 누웠다가 앉았다가 일어났다. 그나마 특별한 행동으로 포옹하는 동작이 있긴 했지만, 격투 동작을 찍기 위해 마련해둔 스탠드형 샌드백이 있어 그것을 잠깐 끌어안았을 따름이다. 수상쩍거나 특별히 문제로 여겨질 만한 구석은 없었다.

그럼에도 예선은 기묘한 불쾌감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주 불법적인 일, 불건전한 일에 가담하거나 그런 일에 이용당할 빌미 따위를 준 것 같았다. 대학 시절 도저히 거절하지 못해서 이상한 종교 단체에 따라가던 때, 혹은 처음 보는 자선 단체 행사에 전화번호를 알려준 뒤에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나는 어떤 실수를 했고, 이 실수는 분명 나를 매우 어둡고 고통스러운 길로 이끌 것이다.

예선은 그런 불길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양 팀장이 내 모델링 데이터를 이용해서 외설스러운 로봇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런 로봇을 팔아치워서 온세상 사람들에게 부적절하게 다뤄지는 꼴을 보고 가학적인 즐거움을 충족하려는 게 아닐까?

물론 그 생각에는 구체적인 증거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불길한 망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증거가 없다는 점이 바로 공포스러운 상상의 한계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속절없이 미쳐가는구나.

누구에게 말한들 아주 미쳤다고 할 게 분명했다. 터무니없는 과민반응이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딪혀보기 전에 속단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예선은 인사팀에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물론 얘기를 잘못 꺼냈다가 불이익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지우지는 못했기에, 두루뭉술한 얘기로 시작해서 여차하면 상담을 그만둘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과 각오가 무색하게도, 담당자는 전화를 받자마자 건조하게 답했다.

“회사내 성추행에 대해 상담을 하고 싶은데요.”

“그건 규정상 직접 상담부터 할 수가 없고요, 사이트 들어가셔서 챗봇이랑 상담해보시고 필요하면 추가 연결해 드릴 거에요.”

전화를 끊은 예선은 좀 무례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가, 사람에게 직접 얘기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인공지능을 거치게 하는 게 합당한 부분도 있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곧바로 인공지능 창구를 찾아 상담을 신청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인공지능 챗봇 러바러바에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무엇이든 무러바요.

-상사가 업무에 트집을 잡고 그걸 눈감아주는 대가로 예정에 없던 모델링 촬영을 했습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저런, 업무 트러블과 갑작스러운 촬영으로 놀라셨겠어요. 상사가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했나요?

-아니요.

-다행이에요. 그렇다면 촬영 과정에서 성적 수치심이나 불쾌감을 느끼셨나요?

-아니요. 하지만 굳이 저를 찍어서 촬영을 요구한 데에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몰라서 불안감을 느껴요.

-자발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촬영을 하게 되어 불안감을 느끼셨군요. 하지만 모델링 촬영은 회사 업무에 포함되어 있고 촬영 대상에 특별한 자격 요건이 있는 작업은 아니에요. 따라서 적법한 절차로 이루어졌다면 문제가 되진 않아요.

상담자님의 불안은 업무 처리가 상사가 바라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과 예측하지 못한 요청을 듣고 익숙하지 않은 촬영에 투입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요.

하지만 업무 때문에 상사와 마찰을 겪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예상하지도 못했고 익숙하지도 않은 작업을 하게 되는 것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일을 극복해나감으로써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죠.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을 비하하지 말고 꼭 안아주세요. 당신의 미래를 제가 응원할게요!

또 도와드릴 게 있나요?


예선은 상담을 종료했다.

챗봇은 그녀를 대놓고 이상한 사람 취급하진 않았지만, 명확히 정해진 사유가 나오지 않으면 적당히 달래서 돌려보내도록 만들어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예선은 성적 불쾌감을 느꼈다고 답하는 게 나았을까 후회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있게 답할 만큼 명백한 성적 불쾌감을 느끼지 않은 게 사실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거짓으로 싸우는 건 그녀가 가장 경멸하는 짓이었다. 상대가 휘두르는 거짓과 기만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궁극적인 방법이 똑같은 것일 수는 없었다.

예선은 새삼 다시 암담해졌다. 이런 식으로 싸운다는 게 과연 가능하긴 한 것인지, 자신을 지키기 이전에 정신을 붙들어맬 수나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은 물론이고 인공지능조차 없이 홀로 수렁 한복판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런 기분이 왜곡된 것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예선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가, 얼마 전 그런 암담함에서 자신을 끌어냈던 게 맛있는 타르트였다는 걸 떠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삶을 채색할 음식을 알려준 정원에게 다시 한번 감사할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그녀는 문득, 정원이 보통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어찌보면 인간인 동시에 인공지능이기도 했던 것이다.


양 팀장은 예선의 모델링 데이터를 이용해서 곧바로 ‘디지털 정예선’을 만들었다. 자동 제작 툴에 몇몇 정보만 넣으면 되었으므로 어려울 건 없었다.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하는 것보다 간단했다.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누구나 갈망하던 상대를 당장 손에 넣을 것이다. 외모와 행동 패턴을 로봇에 반영하면 평생 이상형과 살 수도 있겠지.

양 팀장은 생각했다. 그러나 원하는 바를 정말로 획득하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왜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니까. 자신의 갈망을 직시하고 탐구하지 않으면 채울 수도 없는 법이다.

완성된 디지털 정예선은 아름다웠다. 외양이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성적 매력을 그다지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어찌봐도 확실했지만, 의도와 목적에 맞게 구현된 모습과 완성도는 양 팀장이 보기에 몹시 좋았다. 심지어 이를 완벽히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층 더 탐스러워 보였고, 가슴이 전에 없이 떨렸다.

이것이 정말 사랑이라면 이 감정은 무엇으로 촉발되는 것일까.

양 팀장은 화면 속 예선의 모습을 응시하다 계획했던 대로 예선에게 여러가지 행동을 시켜 봤다. 우선 평범한 회사의 모습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것부터. 성인잡지 모델 같은 모습이나 포르노 같은 꼬락서니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양 팀장의 예감은 그런 흔해빠진 시도가 무의미할 것이라 말했다.

그가 예선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그런 흔해빠진 충동보다 훨씬 특별하고 순수했다. 그리고 유전자 전달의 강박과 호르몬 작용에 시달리는 현대 이성애자 성인 남성인 이상, 상대가 누구든 성적 기호에 맞는 영상을 접하면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그런 쪽의 시도가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리 만무했다.

양 팀장은 회사 생활의 모습을 시뮬레이션해서 돌려보는 동안 여러 각도에서 예선을 한없이 관찰했다. 이보다 더 무엇을 진지하게 관찰해본 적이 없을 지경이었다. 소 선배의 모습의 어떤 부분이 자신을 감탄시키는지, 그리고 왜 사진은 그런 감정을 주지 못하는지 알아볼 때도 이 정도로 집중하진 않았다.

그러나 양 팀장은 그런 노력에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감정적인 동요가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별다른 사건이 없는 일상의 모습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양 팀장은 시뮬레이션의 설정을 바꾸어 사무실의 사람들이 예선과 상호작용하게 만들었다. 회사에서 사건이 일어난다면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양 팀장은 대강의 행동 패턴을 입력한 자기 자신의 디지털 모델이 예선에게 영향을 주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변화는 그 즉시 일어났다. 예선이 양 팀장에게 무슨 구박을 당하고 자기 자리로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마음속에서 뜨거운 기쁨과 갈망이 끓어올랐다.

저 모습을 더 보고 싶다. 항상 보고 싶고, 언제나 함께할 수 있게 소유하고 싶다.

양 팀장은 자신이 받은 느낌을 더 구체화해서 확인하고자 비슷한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연출하면서 디지털 예선의 모습을 확대해서 살펴봤다. 그 결과 확실해졌다.

양 팀장은 예선이 위축된 모습, 저항감을 억누르고 굴종하는 모습에 감정이 흔들렸다.

구박당하고 좌절하고 부조리와 불합리에 맞서다 포기하고 돌아가는 순간의 말투와 목소리, 표정, 그리고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그것이 양 팀장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형체 없는 충동의 덩어리를 자극했다. 바로 이것이었다. 어쩌면 어릴 때 소 선배의 사진에서 감탄을 느끼지 못한 것 역시 어떤 종류의 ‘반응’을 담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양 팀장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묵직한 자극과 의문 해소의 기쁨이 동시에 몰려들어 평생 느껴본 적이 없는 수준으로 놀랍고 당혹스러우며 즐겁고 행복한 심정이었다. 아니, 행복하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양 팀장은 그런 감각과 감정의 혼돈이 두렵고 고통스러웠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런 것에, 고작 자기 내면의 감각과 감정에 질 수는 없었다. 관찰하고 분석하고 맞서고 이기고 정복하는 것이야말로 양 팀장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었다.

양 팀장은 자신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로 마음먹고 예선이 남에게 구박당하는 모습도 시뮬레이션해서 관찰했다. 자신이 관여하지 않더라도 예선이 공격당하고 좌절하는 모습만 보면 흥분하는 특이 취향이 아닐까 알아봐야 했다.

잠시 후, 양 팀장은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예선이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구박 당하는 것을 봐도 기분이 상할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심할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해서 시뮬레이션을 중간에 꺼야 할 정도였다.

에로스적 사랑은 배타성을 갖는다. 상대를 독점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나는 정예선에게 에로스적 사랑을 느끼고 있으며, 취향이 기이한 게 아니라 그녀가 풀죽은 모습에서 매력을 발견했을 뿐이다.

양 팀장은 마침내 확고한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예선을 정신적인 궁지로 내몰고 구원하기를 반복함으로써 사랑을 얻어내고 정신적으로 휘둘리지 않는 평화를 얻는 한편으로 즐거움의 원천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뿐이다.

그는 스프레드 시트를 열어 촬영용 소품 중에 조달 가능한 옷의 목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입는 것만으로 사람을 궁지에 내몰 수 있는 옷. 그러면서 모델링이라는 명분에서 벗어나지 않는 옷…….

양 팀장은 암담한 표정으로 겨우겨우 내키지 않는 옷을 입은 예선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가를 손으로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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