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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 죽이기 06

by 이건해

#6


양 팀장은 다소 흥분했다. 아니, 강렬한 사랑을 느꼈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는 예선의 주눅든 모습을 보고 꿈에서 어렴풋이 느꼈던 것과 유사한 쾌락을 느꼈다. 그것은 몸과 마음 양쪽의 깊은 곳에서 치미는 듯한 불길 같은 감정이었는데, 그 자체만으로 충족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탈 것을 갈구해서 요동치는 것 같았다. 양 팀장은 그 감정을 음미하는 한편으로 불길이 영혼의 다른 부분을 태워버리지 않도록 주의깊게 관찰했다.

동시에 다시 한번 의문이 머리를 쳐들었다.

나는 왜 예선을 사랑하는가?

오늘은 예선의 어떤 특정한 모습이 자신의 잠재 기억의 한 부분을 자극하는 것은 아닐지 유심히 관찰해봤다. 아주 어릴 때 애착을 가진 대상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면 그 애착이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러나 그 가설이 맞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실망하고 주눅들어 둥글게 움츠러든 예선의 등허리에 가깝게 지낸 옆집 누나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라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유치원 때 짝을 이루어 발표용 춤을 췄던 여자애가 원장에게 혼나서 울기 직전의 표정이 예선의 울상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기억은 열심히 떠올리려 한다고 해서 손쉽게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떠올린다 해도 진짜라는 보장이 없었다. 사람이란 신기하게도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면 그걸 정말로 믿고 상상을 기억으로 전환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의문을 해결하려면 예선의 모습과 움직임을 더 체계적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사랑이라는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한편으로 그런 분석도 명확히 해둬야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고통받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선을 분석하려면 사진을 대량으로 찍어봐야 할까.

양 팀장은 무심결에 그런 생각을 했다가, 다음 순간 자신이 이와 비슷한 탐구에 매진한 경험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양준범, 그가 중학교 2학년이던 때, 아파트 같은 동에 대단히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준범과 같은 학교 한 학년 위의 소 선배로, 누구나 연예계로 가야 한다고 주장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스쳐 지나가다 무심코 돌아보는 사람이 제법 많은 수준의 외모였다.

준범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길 때가 제법 되었다. 집 근처와 학교에서 마주치면 자기도 모르게 멈춰서서 바라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준범은 그때의 감정을 사랑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심장박동이야 조금 빨라졌지만,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강렬한 감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준범은 소 선배를 보며 그 나이대의 소년이 빠져들기 쉬운 성적 환상을 꿈꾸기는커녕 그녀와 말 한마디라도 나눠보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욕구조차 느끼지 못했다.

대신에 준범을 사로잡은 것은 소 선배를 볼 때 느끼는 감탄 자체에 대한 의문이었다.

나는 왜 소 선배의 모습을 볼 때 감탄을 느끼는 걸까.

아마 남들처럼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감탄과 미세한 감정의 동요를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면 준범은 단순하게 청소년기의 열병만을 앓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 동네, 그 학교 소년들이 대부분 그런 식이었으니 별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준범은 남다른 소년이었다. 그는 숨막히게 엄격한 법조계 집안에서 자라는 동안 가슴으로 느끼기 전에 머리로 생각하는 법을 배웠고, 감정에 휘둘리는 대신 분석에 나서는 것을 자기 보호와 생존의 방편으로 삼았다. 그런 준범이 소 선배를 보고 느끼는 감동의 원인을 분석해보기로 한 것은, 그 자신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준범도 인간으로서 갖는 기본적 교류 욕구 정도는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느날 우연히 소 선배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가까이서 대답하는 얼굴을 보면 자신의 탐구에 쓸 만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준범은 엘리베이터의 광고용 모니터에 나오는 신발을 보고 툭, 흘리듯이 중얼거렸다.

”저거, 진짜 편한가……? 요즘 많이 신던데…….“

소 선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깊이. 그런데 그 생각은 그녀가 내릴 8층까지 이어졌고, 결국 소 선배는 답하지 않고 내렸다.

준범은 순간 혼란스러웠지만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무시한 걸까? 아니다. 혼잣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머리에 가려진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확인할 수 없는 일에 집착하길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스마트폰에 부착하는 망원렌즈를 주문했다.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남이 순순히 보여주리라는 생각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후로 준범은 소 선배가 언제 어느 길을 통해 어떤 가게, 어떤 학원 따위에 다니는지 파악하고 시간이 될 때마다 그녀의 사진을 찍었다. 중학생이야 움직이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일정도 거의 정해져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준범은 시간이 날 때마다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사진 속 소 선배의 얼굴은 분명 현실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웠음에도 현실에서 볼 때의 감탄스러운 빛을 품고 있지 않은듯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장난을 치는 모습이 천사처럼 아름다워 다른 세계 사람처럼 느껴질 지경이었음에도 소 선배의 사진은 직접 마주칠 때의 감동을 전혀 담지 못했던 것이다. 혹시나 해서 동영상을 찍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준범의 탐구 활동은 결론을 얻지 못한 채 한 달만에 끝났다. 패스트푸드점 2층 구석에서 창밖 통학로를 찍어대는 모습이 우연히 지나가던 교사에게 발각되어 벌점을 받고 부모에게 그 사실이 통보된 것이다. 특별히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 사진은 없으며 무단 촬영은 소 선배가 종종 겪는 일이라 중대하게 다뤄지진 않았다. 그러나 조용히 묻힐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준범이 ‘몰카범’이라는 소문은 은근히 퍼졌고, 그는 부모의 결정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깊은 곳에 묻어뒀던 기억을 떠올린 양 팀장은 소 선배와 예선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지만, 그들에 대해 느낀 감정에 대한 의문은 유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그때의 의문까지 한꺼번에 해소할 적기다. 그때 수치스러운 실패로 끝난 탐구는 바로 지금 성공적으로 마쳐야 한다. 나는 지금 그럴 힘과 방편을 갖추고 있으니, 결국은 영혼의 평화를 쟁취하게 될 것이다.

양 팀장은 사진처럼 단순한 데이터는 쓰지 않기로 하고, 대신에 회사의 고급 장비를 활용하기로 했다. 이 회사에 사람의 모습과 움직임을 분석할 도구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 마치 미리 안배된 길처럼 느껴졌다.

다만 예선처럼 조심스러운 여자라면 반격을 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양 팀장은 휴대 전화로 인사팀의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약의 일이 벌어진다해도 어린 시절처럼 무력하게 휘둘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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