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선의 짐작대로 양 팀장은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애타게 사랑한다고 말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정신차리고 보니 격렬한 감정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눈을 뜨든 감든 예선의 모습이 생각났다. 양 팀장은 자신을 합리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살았기에 사춘기에나 휘말릴 법한 감정의 혼란에 적지 않게 동요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여성도 이 정도로 마음을 빼앗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극히 평범한 예선이 나를 이토록 매료한 것일까?
양 팀장은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을 점검했다. 선량하고 부탁이나 거절을 어려워하는 성격이 마음에 드는 것일까? 아니었다. 양 팀장은 필요한 사항을 바로 요구하고 원치 않는 일을 확실히 거절하는 성격이야말로 합리적이고 우수한 것이라 여겼다.
그렇다면 목소리나 어조가 좋은 걸까? 아니었다. 예선의 목소리는 약간 높고 가늘 뿐, 평균에 가까운 편이었다. 어조도 일반적인 서울 말씨라 특별히 끌리는 지점이 있지 않았다.
양 팀장은 이제 예선의 외모를 살펴보았다. 눈이 크거나 쌍커풀이 진해서 예쁘거나 코가 높고 오똑한 것도 아니고, 이목구비가 조화롭거나 특별히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매는 또 어떤가? 날씬하고 쭉 뻗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볼륨감이 넘쳐 공격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보통 키, 보통 체형의 여성일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양 팀장은 아무리 고심해도 이해할 수 없었고, 자신이 이런 중대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두려움마저 느꼈다. 게다가 두려움 때문인지 예선이 매일 밤 꿈에도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음탕하고 저속한 꿈이었다. 양 팀장은 예선을 품에 안고 성행위를 하며 저열한 쾌락을 느끼는 꿈속의 자신이 경멸스러워 죽여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자연히 양 팀장은 예선을 곱게 봐줄 수가 없었다. 만악과 번뇌의 근원은 증오해 마땅했다.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었다. 자기 자신만 이따위로 고통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계획을 세우고 하나씩 수행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고통이 필요했다. 그래서 약간만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면 외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대량의 단순 업무를 예선에게 떠넘기고 그녀가 변해가는 꼴을 지켜보았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예선은 하루하루 피폐해졌고, 살아숨쉬는 인간이 가져야 마땅한 빛을 잃어갔다. 양 팀장은 그녀가 고통 속에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동안 고삐와 채찍을 쥔 쪽이 자신이라는 걸 새삼 실감하며 안도를 느꼈다. 그것은 잠시 저열해지며 무너졌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양 팀장은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예선에게도 두 사람의 주종관계를 명확히 하고 싶었다. 그는 이대로 조금만 더 밀어붙인 다음 사소한 기쁨을 하나씩 던져주기로 했다. 그러면 예선은 그를 경외해 마땅한 존재로 여길 테고, 그 뒤에는 예선의 일거수일투족에 휘둘리지 않게 될 게 분명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그녀가 정원을 만나서 카페에 갔다오기 전까지는.
정원이 예선에게 외출 제안을 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의 목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변수였다. 그래서 일이 일어난 뒤에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원은 안정적인 부와 명예를 집어던지고 일반 기업에 들어온 머저리 떨거지 의사다. 게다가 일 이외에 어떤 사교적 활동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저능함을 확고히 했는데, 왜 이제 와서 여자에게 손을 내민단 말인가?
양 팀장은 우선 인공지능 자료 수집기에 정원에 대한 자료 수집을 명령했다. 변화의 이유를 알아야 대처도 쉬울 테니. 그 뒤에는 보안팀에 돈을 주고 빼낸 외부 감시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볼 때마다 영혼 깊은 곳을 뜨거운 갈고리로 긁어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양 팀장은 이를 악물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비탄에 찬 숨을 토했다.
두 사람이 간 카페는 나중에 기회를 잡아 소개하려고 봐둔 ‘당근’이었다. 사내 게시판에서 맛집 정보를 알아보고 직접 방문까지 해서 확인한 곳인데, 이렇게 어이없이 계획이 망가졌다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분위기 좋고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카페에서 무슨 얘기든 나눴을 거라고 생각하면 속이 뒤집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둘 다 혀와 눈을 뽑고 찢어 죽여버리고 싶다.
양 팀장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가, 문득 그게 정상적인 생각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미친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그를 괴롭히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합리한 감정이었다. 남을 좋아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되진 않는다. 양 팀장은 깊이 생각해보고 결론지었다.
그가 아는 한 그런 감정은 사랑밖에 없었다.다른 말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원인은 모르지만 나는 정예선을 사랑한다.
그렇게 결론내리고 나자 마음이 약간 편해졌다. 병명을 알아낸 셈이다. 병명이 확실하면 치유법도 좁힐 수 있다. 양 팀장은 이제 사랑이라는 병을 치유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사람을 죽도록 뒤흔드는 이 지독한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길은 어떻게 궁리해도 두 가지 뿐이다. 사랑을 얻는 것, 또는 상대를 제거해서 실패할 확률을 없애는 것.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서 감정이 기다린다는 방법도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양 팀장은 그게 자신에게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일이 어떻게 굴러간대도 예선이 눈에 보이는 한, 혹은 존재하는 한 포기하지 않고 고통받을 게 분명했다.
양 팀장은 자연히 첫 번째를 택하기로 했다. 방법이 지금까지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아 보였으므로 무엇보다 합리적이었다.
계획을 수정한 양 팀장은 일단 예선이 가장 갈구했을 자유를 선사했다. 과도한 데이터 처리가 업무를 방해한다는 논의가 조금씩 진행되는 중이었으므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였다. 단둘이 먹는 것은 아직 이르니까 회식을 가장해서.
그런데 식사중에 흘러나온 로봇 동반자 이야기를 듣자니 놓친 부분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정작 예선이 사람과 연애 관계를 맺을 의향이 있는지 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양 팀장은 연애와 결혼을 원하든 원치 않든 결국은 따라야 하는 흐름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미처 고려하지 못했지만, 예선이 연애와 결혼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만약 그녀가 연애를 할 마음이 있다면 일이 수월해지긴 하겠으나 정원을 경계할 필요가 있을 테고, 그럴 마음이 없다면 정원을 경계할 필요는 없겠으나 없는 마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게 난점이 될 터였다.
게다가 술자리에서 말이 나온 대로 요즘은 로봇 동반자를 구해서 정서적인 안정감과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는 게 새로운 삶의 양상으로 각광받는 추세였다. 기존의 혼인 제도에 염증이나 장벽을 느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 로봇 동반자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으므로, 중산층 미만의 가정에서 자란 예선 역시 로봇과의 삶을 목표로 삼고 있을 확률이 낮지 않았다.
그래서 양 팀장은 예선에게 넌지시 의견을 물었다. 예선은 확답을 꺼렸다. 그의 생각을 먼저 물었다. 상정했던 최악의 반응은 아니었다. 인간도 남자도 절대 믿지 않는다는 게 가장 끔찍한 답일 텐데, 적어도 예선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거나, 그런 생각을 표출하지 않을 정도로 양 팀장을 존중하는 게 분명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양 팀장은 예선의 생각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원하는 바를 얻어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