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선아, 내가 괜찮은 애 하나 소개시켜 줄까?”
대학교 2학년 때 수업이 좀 겹치면서 적당히 친해진 최 선배는 어느때부터인가 그런 말을 무슨 인삿말처럼 던지곤 했다. 친해졌다고 해봤자 수업이 끝난 뒤에 이따금 점심을 같이 먹고 카페에서 과제 얘기를 하는 수준이었지만, 최 선배는 그런 관계가 편했는지 수업과 별 상관도 없는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전 여자친구가 성격이 좋지 않았다는 둥, 옷을 새로 살까 하는데 어떤 게 낫겠냐는 둥, 예선으로서는 아무 상관도 관심도 얘기에 은근히 고통스러웠으나, 그녀도 타인과 지내려면 관심이 가는 얘기만 하고 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기에 가능한 선에서 얘기를 받아주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 시작된 연애 얘기는 받아주기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단순한 남의 연애 얘기라면 적당히 드라마 얘기라도 듣듯이 넘어갈 수 있겠지만, 최 선배가 시작한 건 예선의 삶을 자꾸 다른 틀에 욱여넣으려는 시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연애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답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최 선배는 연애에 대한 무관심을 미성숙한 자아의 증명처럼 받아들였다.
“인간이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는 거 아냐? 그게 맞는 거지. 너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태어난 거잖아. 내 말이 틀려?“
부모님이 사랑해서 제가 태어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죠. 그리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
예선은 당장 마음속으로 반박했지만, 그 반박을 입으로 꺼내진 않았다. 확고한 결론을 가진 사람과 다퉈봐야 피곤하기만 하지 얻을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적당히 넘어가는 게 제일이다.
그러나 예선의 침묵을 수긍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최 선배는 당장 소개팅을 제안했다.
“내 고등학교 동창인데, 진짜 너랑 잘 맞을 거야. 걔도 책 좋아하고 말수 적은 I거든. 당장 사귀라는 게 아니라 취미 같은 친구랑 얘기나 해본다 생각해. 사람을 만나봐야 마음이 움직이나 알지, 만나보지도 않고 관심 없다고만 하면 무슨 변화가 있어? 주말에 시간 되지?”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얘기를 진행시키는 게 당황스러운 정도를 넘어서 화가 치밀 지경이었다. 예선은 결국 언성을 높였다.
“선배, 저 연애에 정말 관심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바뀌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그러니까 이제 그런 얘기 그만 좀 하세요. 듣는 사람 피곤하니까.”
“아, 그래. 미안.”
뜻밖에도 입을 다문 최 선배는 이후로 한동안 연애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예선은 그나마 말이 통하긴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한 달이 지난 뒤, 팀별 과제를 위해 오페라를 관람하는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예선의 팀은 최 선배와 또 다른 사람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약속한 당일 아침에 팀원이 아프다고 빠지는 바람에 최 선배와 둘이서 공연을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명성에 걸맞게 좋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예선은 신경이 곤두서서 감상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이 기회를 노리고 최 선배가 또 뭔가를 강요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났다. 공연을 보는 건 데이트에서 종종 있는 일이니까, 연애 활동으로 남녀가 놀러 다니는 일의 즐거움을 설파하려 들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새삼 화가 치밀었다. 그게 그렇게 좋다면 그냥 혼자 즐기면 될 일이지 왜 남에게 강제하려 드는 걸까. 남에게 연애를 시킴으로써 특별한 이득이라도 보는 걸까? 그 행태는 거의 포교에 가까운 듯했다. 아마 최 선배 같은 사람에게는 연애만이 생명과 구원의 세계고, 비연애는 죽음과 낙오의 세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답이 없는 세계관으로 사는 사람을 설득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건 세계를 만드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예선은 도망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집에 일이 생겨서 빨리 가야 할 것 같다고 하자 최 선배는 밥 먹고 미팅까지 하고 갈 예정이었던 걸 너까지 갑자기 빠져서 밥을 혼자 먹게 만드는 건 경우가 아니지 않냐고 했고, 예선은 모질게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 최 선배가 헛소리를 할 거라는 생각은 가설에 불과한 데 비해 자신이 거짓말로 약속을 깨는 건 사실이니 마음이 부담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게 따라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최 선배는 느닷없이 조그만 꽃다발을 꺼냈다.
“예선아, 속는 셈치고 나하고 사귀어 볼래?”
목소리가 떨리는 게 장난은 아닌 듯했다. 예선은 시야가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은 이해할 수 있으나 맥락과 의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사귀자고 하세요?”
“아닌데, 좋아하는데.”
답은 간단했지만 역시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요? 그리고, 그럼 왜 누굴 만나보라고 하셨어요?”
“그냥…… 마음이 가고, 보다 보니까 예뻐 보이는 걸 어떡해.”
최 선배는 민망한지 얼굴이 좀 상기되었다.
“그리고 친구 만나보라고 한 건, 누구 사귀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궁금해서 그랬어.”
떠봤다는 얘기다. 예선은 대체 뭐가 예쁘다는 소리인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의문스러웠으나, 캐물어봐야 불쾌하기만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고 결론부터 전하기로 했다.
“그때 말했잖아요. 연애에 관심 없다고.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못들은 걸로 할게요.”
최 선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얼굴의 그림자는 실망의 기색보다 짜증이 짙어 보였다. 그는 꽃다발을 옆자리 의자에 내려놓고 잠시 뜸을 들이곤 말했다.
“넌 어떻게 마음은 고맙다는 소리도 안 하냐?”
“고맙지 않아서요.”
“아무리 그래도 고맙거나 미안한 시늉이라도 하는 게 정상 아니야?”
예선도 미디어에서 그런 식으로 거절한다는 건 알았지만, 남 때문에 불편한 상황에 처한 마당에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최 선배가 애초부터 꽃다발을 준비했다면 둘이 남을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니, 팀원도 최 선배의 부탁으로 빠졌을 게 분명했다. 사전에 작당모의를 한 셈이다. 예선은 이런 식으로 남을 속여서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게 다른 무엇보다 화가 났다. 그런데 대체 무슨 고마움이나 미안함이 있겠는가.
“얘기 끝났으면 먼저 갈게요.”
예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등뒤에 최 선배의 말이 날아들었다.
“시발, 벽에 똥칠할 때까지 혼자 잘 살아봐라.”
잠에서 깬 예선은 잠시 어두운 고요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어느 시간에 있나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서서히 현실에 대한 감각을 되찾는 동시에 심장이 비틀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최 선배의 교제 제안을 거절한 뒤로, 예선은 구설수에 올랐다. 최 선배가 익명 게시판에 올린 글이 인기를 얻으면서 두 사람의 신원이 특정된 것이다. 글을 쓴 최 선배부터 신원을 적극적으로 감출 생각이 없었으므로 같은 학교 학생들이 정황을 이모저모 따져 후보를 추려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예선은 학교에서 알던 사람이든 처음 보는 사람이든 자기를 보고 괜히 웃거나 어딜 다녀오는 사이에 쑥덕거리는 경우를 자주 겪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남이 뭐라하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누가 자기 얘길 하는 건지 아닌지 매번 의심하기 시작하니 산채로 몸 어딘가를 갉아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 예선은 전보다 더 남과 얽히지 않게 주의하고 살았다. 남자와 둘만 남는 일은 물론이고 1대1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상황도 만들지 않으려 했다. 연애 비슷한 얘기라도 입에 올리는 사람은 남녀노소 모두 피하고 독서나 영화 취미가 비슷한 사람몇 명만을 만나 교류했다. 타인의 삶을 자기의 삶에 편입시키려 하거나 타인의 가치관을 기괴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으로부터 피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조심했음에도 느닷없는 교제 신청은 서너 번 더 이어졌고, 예선은 그때마다 거절하고 어디선가 욕 먹기를 반복했다. 그런 불쾌한 경험으로 그녀가 알게 된 것은, 예선의 생각을 이상하게 여기며 연애를 하는 게 응당 해야 하는 일인 양 설득하려 한 남자 대부분이 자신이 연애를 향유할 방편으로 예선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의 참견질은 탐색의 성격을 띤 구애 활동의 일환이었다.
예선은 관자놀이가 휘저어지는 듯한 기분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과거의 악몽으로 깨달은 사실에 짓눌리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양 팀장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그의 참견질도 예선이 그동안 겪어본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으므로,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었다.
예선은 어둠속에서 질척하게 발끝을 휘감는 분노와 절망과 공포를 한꺼번에 맛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