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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 죽이기 01

by 이건해

#1


정예선은 누구든간에 죽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누구나 자신이 하기로 한 일,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을 다른 일로 방해받으면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런데 예선이 단순한 스트레스를 넘어서 살인 충동까지 느낀 것은, 그녀에게 별안간 던져진 일이 자신이 하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한 적이 없는 일인 데다가, 그 일을 원래 해야 할 사람이 도망쳤고, 심지어 추가적 노동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선에게 던져진 일이란 로봇 동반자의 움직임에 대한 수만 줄의 데이터 시트를 일일이 검수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직장인 ‘더블 기어 코퍼레이션’은 ‘완전하고 영원한 동반자’라는 모토 로 로봇 동반자를 비롯한 인간 친화형 로봇을 주로 개발하는 대기업이었고, 그녀가 소속된 분과는 인체 모델링과 알고리즘 개발을 주로 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다양한 연구소에서 들어온 데이터를 알맞게 정리하는 작업이 상당히 크고 중요했는데, 중요도에 비해 작업이 단순해서 성장하는 느낌은 하나도 주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리고 이 작업을 전담하던 심정석 주임은 며칠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나오지 않기 시작하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고를 당했다곤 해도 가벼운 타박상과 염좌에 불과한데 그런 식으로 절차를 무시하고 일을 그만둔다는 건 상당히 매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심 주임이 맡았던 업무가 누구라도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것이었던 데다가 심 주임이 양준범 팀장과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파다했기에, 동료들은 심 주임을 그럭저럭 딱하게 여기게 되었다. 예선도 그렇게 생각했다. 심 주임의 일을 모조리 떠맡기 전까진.

원래 예선이 담당한 일은 로봇의 행동 원리를 짜서 입력하는 작업이었다. 치밀한 기계학습으로 성장한 인공지능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살피고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작업도 있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특정 상황에서 할 일을 아예 정해주는 쪽이 훨씬 많았다. 로봇 청소기로 예를 들자면 주변 장애물을 센서로 인식하고 무엇인지 판단하여 움직임을 결정하는 과정은 기계학습에 따른 것이고, 충전 명령을 받아서 충전을 시작했을 때 어떤 음성 안내를 할 것인지, 어떤 순서로 모터를 가동해서 자동 세척을 진행할지 판단하는 과정은 하나하나 정해주는 것이었다.

인공지능 발달로 기계학습 분야가 각광받기도 하고 더 고등한 기술로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정해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프로그래밍도 당연히 필수적이었고, 예선은 다양한 상황을 인간이 직접 고려해서 판단을 미리 짜놓는 작업을 좋아했다. 그것은 마치 단어만 인식하고 대답하는 구시대의 단순한 챗봇 스크립트를 작성하는 일, 또는 플레이어의 행동을 예상하고 힌트를 숨겨놓는 방탈출 게임의 구성 같은 일이었다. 넓은 상상력과 치밀한 예상을 바탕으로 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보기보다 제법 창조적인 일이라고, 적어도 예선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그녀에게, 그 누구라도 이런 단순 반복 작업을 꼭 인간이 해야 하겠냐고 물을 법한 작업이 무더기로 떠넘겨진 것이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예선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교한 조각을 하다가 산더미같은 장작까지 패게 된 기분이었다. 얼마나 절망적인지, 어지간해선 거절도 부탁도 잘 하지 않는 그녀도 당장 외주를 쓰면 안되겠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준범 팀장은 인자하게 웃으며 답했다.

“보안 규정상 그럴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외주를 쓰자면 예산 문제도 있고. 정 힘들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부탁 좀 할게요.”

서른 둘인 예선보다 다섯 살 위인 양 팀장은 그렇게 어려운 부탁을 할 때마다 아주 부드럽게 웃었는데, 로맨스 드라마로 유명한 어느 남자 배우의 사촌쯤 되지 않겠냐는 소문이 있는 그의 미소는 확실히 거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미모 때문에 마음이 누그러져서라기보다는 미소가 용도에 맞게 기술적으로 치밀하게 연마되어 있어, 거기에 대고 항변을 해봐야 소용이 없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는 것이다. 마치 드높은 성벽 앞에서 전의를 상실하게 되는 것처럼.

결국, 예선은 아주 복잡하지도 않은 일인데 빨리 끝내버리자고, 이런 잔업이 한두번이냐고 생각하며 고분고분 그 일을 떠안기로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든지, 아니면 정면으로 빠르게 돌파하는 게 답일 것이었다.

그러나 예선이 땅을 치고 이를 갈며 후회하기까지는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 주임이 처리한 데이터 시트를 원본과 대조해 보니 틀린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틀려도 어떤 규칙성이 있으면 어디서 어디까지 서식을 잘못 봤다거나 열을 착각했다거나 하는 문제를 발견해서 검토할 곳을 좁힐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규칙성을 조금도 찾아낼 수 없었으므로 예선은 일단 모든 데이터가 정상인지 일일이 검수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입력해야 하는 데이터 중 상당 부분은 또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추가로 연산 작업을 거쳐야 했고, 하필 그 담당자는 육아휴직을 한 터라 대직자가 예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 사람에게 일을 더 넘겨줄 수 없었던 예선은 결국 데이터 처리에 필요한 툴 사용법을 스스로 익혀서 써야 했다. 당연히 작업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늘어났다. 야근을 두 달은 더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저번 달부터 회사 방침이 변하는 통에 이제는 잔업으로 인정되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심지어 업무 시간 이후에 의자에 앉아 있으면 센서가 작동하여 경고까지 받기에, 다들 정규 업무가 끝나면 엉거주춤하게 일어나서 불편한 자세로 작업을 하다가 허리를 폈다가 다시 작업 하기를 반복하는 형국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가 맡은 일을 집어던지는 것만은 해선 안 되며, 그런 짓을 하는 인간은 사회인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왔던 예선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추가 작업과 원래부터 해야 하는 일 모두에 붙잡힌 채 죽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회사에 들어왔을 때는 어린 시절에 친구가 되어 주었던 인형보다 더 나은 존재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 그지 없었는데, 이제 자신이 무엇을 왜 하는지도 모를 판이었다. 이걸 왜 내가 해야 하냐고, 사고로 일어난 일은 회사에서 알아서 하라고 욕설을 퍼붓고 때려치우는 게 맞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소심함 때문인지 빈곤 때문인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렇게 무의미한 일에 짓눌려 죽어가느니 깔끔하게 바로 죽으면 훨씬 낫겠다는 생각도 이따금 들었다.

동료들은 그런 예선의 처지를 보고 제법 안타까워했다. 힘을 내라며 먹을 것을 사주기도 했다. 그러나 업무를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외주로 맡길 수 없다면 팀원들이 나눠서 처리해도 될 텐데 그렇게 하자는 얘기가 없는 게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예선은 일을 여럿이 나누면 안 되겠냐고 얘기를 꺼내볼까 몇 번이고 생각해봤으나, 그것 역시 심 주임처럼 주어진 일을 남에게 떠밀어 폐를 끼치는 짓이 아닐까 싶어 포기하고 말았다. 누가 먼저 도와주겠다고 하지도 않는 건 다들 죽도록 바쁜 탓이겠지, 하고 예선은 생각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시커먼 고립감이 스며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 그녀를 도와주겠다는 동료가 나타난 것은, 2천 년 같은 2주가 지난 뒤였다.

“힘든 일 맡으셨다고 들었는데, 요 앞에서 잠깐 타르트라도 드시는 건 어떻습니까?”

공용 냉장고에 넣어둔 콜드브루 커피 원액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잠시 멍하니 서서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는 게 맞는지 고민하는 예선에게 말을 건 것은, 두뇌 보강 연구팀의 박정원 주임이었다. 뇌외과 의사를 그만두고 경험을 살려 로봇 제작에 도움이 되고 싶다던 인터뷰까지 사보에 실렸던 사람이라 모를 수가 없었는데, 그 역시 회사에서 알아주는 진창에 빠진 예선을 잘 아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으면 잘 모르는 남자와 둘이서 뭘 먹으러 간다는 선택지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모르는 사람과 교류하길 꺼리는 성격인 데다가, 대학 때 남자 몇 명의 교제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어 최소한 회사 안에서 남자와 사적인 교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선은 그런 자신의 성향과 방침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예선은 아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택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온갖 업무와 제약으로 옭아매는 듯한 회사에 대한 반발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육체적 허기나 이러다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감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결정이 정원에 대한 호감에서 나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정원은 말끔할 뿐 다른 인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산뜻하거나 훈훈하지도 않았고 음흉하거나 꺼림칙하지도 않았다. 그렇게까지 인상이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본 일이 없었다.

근무 시간에 특별한 사유 없이 사옥을 벗어나는 건 금지되어 있었으나, 이유도 잘 모르는 일탈이었던 탓인지 금기를 깨는 행위에서 느낄 만한 해방감 따위도 별로 없었다. 예선은 무감한 상태로 정원과 함께 걸어 회사 앞의 카페에 들어갔다. 통유리에 온통 희게 칠해져 이렇다할 특징이나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는 카페로, 붐비지 않을 시간이라 손님은 없었다.

예선이 자리에 앉자 정원은 기다리라고 하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에그 타르트를 사왔다. 예선은 그게 멍하니 앉아있다 정원이 권하는 대로 에그 타르트를 한 입 먹었다. 그제야 정신 비슷한 것이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었다는 사보 인터뷰대로, 맞은편에 앉은 정원은 기다리라는 말과 먹어보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관광객끼리 맛집에서 합석하게 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예선이 남을 꺼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어색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입안에서부터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타르트는 맛이 있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예선은 삶의 색채가 돌아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달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맛이었다. 예선은 달콤한 맛이 입안에서 부서지고 감기는 동안 자신이 완전히 파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혼자 산 채로 관 속에 누워있는 게 아니었다.

예선은 결국 울면서 타르트를 먹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앞이라 참긴 했지만 눈물을 완전히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미각의 기쁨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이 온몸을 비트는 듯한 고통 속에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원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고 티슈를 내밀었다. 예선은 그의 존재와 침묵이 고마웠다.


타르트와 커피를 다 마실 때쯤 진정된 예선은 아무래도 민망해졌지만, 정원은 깊은 사정을 묻거나 위로하지도 않았고 자기소개나 의미없는 날씨 얘기를 하지도 않았다. 예선도 무슨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터라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먹을 것을 다 먹자, 두 사람은 곧 정해놓기라도 한 듯 카페를 나섰다. 정원이 입을 연 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 데이터, 자동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해드릴까요?”

“네?”

예선이 빠진 지옥에 대한 얘기는 이미 널리 알려졌으므로 그 얘기가 나온 것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놀란 건 자동 처리가 가능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동으로 할 수 있다면 굳이 인간을 이렇게 괴롭힐 이유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그런 데이터도 자동 처리가 돼요?”

정원은 지극히 담답히 답했다.

“지금 개발 중인 엔진을 쓰면 가능합니다. 동반자 로봇의 인공 두뇌에 탑재할 예정이라 자연어 처리에 특화되어 있으면서도 실제 수치를 다루는 데에 오류가 없습니다. 그거라면 외주를 쓸 이유도 없죠. 자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인간이 하느라 고생하는 건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라면 정말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순간 예선의 입이 반사적으로 답할 뻔했으나, 그녀는 정원에게 데이터를 넘겨줬다가 다시 받는 과정을 떠올려보곤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팀에 허락도 없이 데이터를 보냈다는 걸 들키면 굉장히 안 좋을 것 같아요. 팀장님이 무슨 소리를 할지…….”

웃는 얼굴로 무슨 비난을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의 타박을 듣느니 익숙해진 고통을 받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예선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몰래 하면 그만이라는 회유를 듣길 바라는 자신이 있음을 알았다. 자신은 편해지면서 팀장은 싫어하는 일을 저지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원은 당장 수긍했다.

“그렇겠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괜한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요. 좋은 제안 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답하고 나서 다시 걸음을 옮기자니 아쉬움은 금방 사라졌다. 아마 예선이 아쉬움을 잊는 일에 단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은 조용히 회사로 걸어갔다. 드높은 회색빛 사옥은 보기에 따라선 판타지 게임에 나오는 마왕의 탑처럼 보이기도 했다. 예선은 그리로 다시 들어가는 게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행위처럼 느껴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돌아가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죽는 게 아닌 다음에야.

예선은 한순간 죽음에 대해 떠올렸다. 그러나 마음속에 안개처럼 깔려있던 그 생각이 이제 비교적 자조적인 농담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죽지 않고 노동하는 것에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 죽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건 맛있는 타르트 덕일지도 모른다.

예선은 스스로 놀랄 정도로 망설임 없이 말을 꺼냈다.

“저, 주임님, 오늘은 좋은 곳 알려주셔서 감사했어요. 메신저 알려주시면 제가 살게요.”

정원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스마트폰을 꺼내서 QR코드를 보여주었다.

“괜찮습니다. 11500원만 주십시오.”

“아, 네…….”

예선은 정원을 친구로 등록하며 계산했다. 정확히 먹은 만큼의 금액이었다. 흔히 이럴 때에는 한 쪽이 계산을 해서 다음 교류를 이어가곤 하는데, 정원은 그런 풍습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감사를 표하고 싶을뿐 딱히 그 이상의 교류를 원하지 않는 터라 호감의 표시라는 오해를 사는 게 아닐까 미약한 걱정을 했던 예선은 덕분에 안도했다.

예선은 돈을 송금하고 정원과 헤어졌다. 정원은 나중에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달라며 인사하고 편의점에 갔고, 예선은 자리로 돌아갔다. 잿빛 디바이더 안의 살풍경한 자리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앉는 마음이 그렇게 지독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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