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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 죽이기 09

by 이건해

#9


“상당히 걱정스러운 일이 있었군요.”

모델링에 대해 이야기하자 정원은 그 어느때보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예선은 항상 놀라울 정도로 말끔하고 침착하며 동요를 보이지 않던 그가 전에 없이 큰 표정을 짓자 새삼스럽게 겁이 났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인사팀에 다시 직접 신고 해볼까요?”

“양 팀장은 발도 넓고 치밀하니 신고에 대한 대책까지 마련해뒀을 겁니다. 챗봇 상담을 우선하는 방침은 저도 처음 듣는데, 어쩌면 이것도 그의 입김이 작용한 탓인지도 모르죠. 그리고 신고가 정상적으로 접수된다 해도 목격자도 없었다니 그런 일은 없었다거나 과장이라는 식으로 발뺌할 준비를 마쳤을 테고, 무마해줄 연줄도 있겠죠. 게다가 사실이 밝혀진대도 모델링 작업 자체가 성추행으로 인정되지는 않을 겁니다. 원래부터 있었고 당연하게 하던 작업이니까요.”

정원의 말에 예선은 서늘한 암담함을 느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인사팀의 담당자가 보인 반응은 과도하게 냉랭했고, 챗봇도 어르고 달래는 데에 치중했다. 만약 그게 착각이었다 해도 직접 상담하는 절차가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또 아무리 불쾌감이나 수치심을 느꼈다고 주장한들, 그런 느낌을 유발한 행위가 일상적 업무의 수행 과정이었다면 죄로 인정될 확률이 낮았다. 이 회사는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여성 복지가 좋지 않기로 유명하기까지 했다.

예선은 잠시 멍해졌다. 양 팀장이 그녀에게 없는 것을 바라고,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하고 있다는 꺼림칙한 느낌은 완벽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직감만은 틀린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남에게 설명하고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자니, 누구나 인정할 만한 부분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 나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예선은 이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이 두려워졌다. 어쩌면 모든 게 다 과민반응이었던 게 아닐까? 모조리 착각이고 양 팀장이 싫은 나머지 실존하지 않는 위협을 머릿속으로 만들어내어 반격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의미도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예선의 눈에 파르페따위 디저트를 먹으며 대화하는 커플이나 테이블에 커피를 두고 작업하는 직장인 등등 여러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정원이 찾아낸 새 ‘안전 카페’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곳의 평화는 예선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일까?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방법 자체가 죄일까?

온갖 생각에 휩쓸리려는 예선을 정원이 붙잡았다.

“예선 씨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조직에서 또렷한 명분 없이 지시를 거부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양 팀장은 업무상 필요해보이는 지시를 통해 예선 씨를 효과적으로 길들여온 것으로 보입니다.”

“길들여왔다고요?”

정원은 천천히, 환자에게 증상을 설명하듯이 말했다.

“양 팀장은 예선 씨에게 불합리하게 어려운 일을 시켜서 절망을 안겨준 다음 선심 쓰듯 거기서 꺼내줬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 무의식중에 상대에게 거스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까지는 흔히 있는 군기잡기에 가깝죠. 그런데 그는 또다시 난해한 작업을 주문하고 트집을 잡아 결국은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운 요구를 듣게 만들었습니다. 거스르기 힘든 사람과 부딪히는 것보다는 좀 부담스러운 요구를 듣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죠.”

정원의 설명을 들은 예선은 가슴 한구석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맞아요.”

“아마도 다음으론 모델링 결과를 칭찬해서 인정욕구를 채워준 다음 약간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서 한층 더 어려운 일을 시킬 확률이 높습니다. 당근과 채찍을 교묘히 바꾸어 쓰는 겁니다. 이런 방식을 반복하면 희생자는 결국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최선이라는 인식에 갇혀 무슨 요구든 들어주게 됩니다.”

예선은 잠시 눈앞이 깜깜해졌다. 절대 봐선 안되는 무대 뒷편의 어둠속, 혹은 암담한 미래를 선명히 비춰주는 수정구 저편을 본 것 같았다.

“제가 팀장님 손바닥 위에 있었던 게 맞네요.”

정원은 담담히 답했다.

“완전한 건 아닙니다. 그걸 인식하고 있다면 벗어날 수도 있으니까요. 정신적 지배는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인식했고 벗어날 의지가 있다면 반은 깨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원의 말은 위로하려는 게 아니라 단순히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예선은 그 의도 없는 말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에서 밥이 다 되었다는 밥솥의 알림을 듣고 삶이 굴러가고 있음을 실감하는 것처럼.

예선은 마음이 진정되자 다시 양 팀장을 떠올렸다. 알 길이 없는 그의 의도는 인기척만 있고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골목길의 그림자 같았다.

“팀장님은 대체 그런 짓을 통해 뭘 원하는 걸까요? 제가……”

예선은 마음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제 외견이나 움직임에 특별한 보존 가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상식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을 계속 상상하면 두려움이 커질 뿐입니다. 상상하지 말고 알아내는 시도를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는 차분하지만 차갑지 않게 설명했다.

“모델링이라는 작업이나 모델링 결과물이 목적일 확률은 낮습니다. 모델링은 창작의 도구에 불과하니까요. 그가 무엇을 만들었다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걸 알면 양 팀장이 원하는 게 범죄인지, 혹은 그가 원하는 일방적 사랑의 기쁨이 범죄적 방식으로만 구현되는 것인지 알 수 있겠죠.”

예선은 정원의 말이 합리적이고 따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그 흔적을 어떻게 찾아내죠? 해킹 같은 건 전혀 할 줄 모르는데요…….”

”예선 씨가 직접 해킹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처리할 테니까요.”

예선은 정원이 두뇌를 개조해서 어떤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아는 거라곤 감정이 매우 무뎌졌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가 처리하겠다고 한 이상 확실히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예선은 다음 문제를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묻기 죄송하지만, 왜…… 저를 도와주시는 거죠?”

묻고나자 예선은 두려워졌다. 싫으면 관두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정원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정원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가 양 팀장이든 정원이든 자신이 돌려줄 게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원은 들을 만한 질문이었다는 듯,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답했다.

“제 아내의 사인이 사고라고 알렸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자살이었죠.”

담담한 말투에 비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예선은 답할 말을 잃었고, 정원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설명했다.

“교통 사고로 저는 두뇌 일부를 잃었고. 아내는 두 손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저 자신이 연구하던 인공 두뇌를, 아내는 신형 의수를 써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죠. 그러나 그야말로 기본적인 생활만 간신히 회복했을 뿐이고, 그밖의 많은 부분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일단 저는 감정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죠. 훌륭한 남편은커녕 정상적인 인간도 아니게 된 셈입니다. 한편으로 화가였던 아내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전혀 못 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의 자기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죠. 아무리 재활을 해도 손끝의 미세한 감각을 살릴 수 없었던 겁니다. 심지어 간신히 작품을 낸 뒤에는 기계 손으로 그린 그림에 가치가 있냐는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정원은 자기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아내는 결국 화가를 그만두고 학원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진귀한 사람 소개하는 방송에서나 몇 번 찾아왔을 뿐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았죠. 기계팔을 가진 화가의 수업은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나마 수제자라고 할 만큼 열성적으로 다닌 학생은 ‘남다른’ 요소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의 의수를 훔쳤다가 발각되었죠. 아내는 학원을 정리했고,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원의 얼굴은 슬퍼보였다. 그러나 그 표정이 진짜 슬픔에서 나온 것인지, 기억에 따라 습관적으로 나온 것인지, 혹은 예선의 마음이 투영되었을 뿐인지 알 수 없었다. 예선은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대체 어떤 말이 적절할지 고를 수가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조차 종잡을 수 없었다.

“저는 아내의 우울감을 인지했지만 적절한 방식으로 공감하고 치유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게 얼마 남지 않은 마음에도 계속 남더군요. 그래서 뇌를 다친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마음을 다치고 혼자 궁지에 몰린 사람들 다수를 돕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로봇 제작을 택한 겁니다. 예선 씨를 도우려는 것도 그런 목적에 부합합니다. 물론 고통 받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자기 가치를 재확인 하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만,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도와주세요.”

예선은 빠르게 답했다. 도와달라는 말을 명확히, 입으로 소리내어 한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정원은 잠시 멍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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