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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Nov 09. 2016

정말 소중한 것은 놓지 말 것

스마트폰의 도래로 너무나 굉장한 세상이 되었다는 얘기를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두드린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멋지다. 한 손에 스마트폰만 들고 있으면 언제나 광활한 정보의 세계에 접속(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만 아주 조금 접)할 수 있다니,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 멋짐은 화장실에서도 결코 바래지 않는다. 


하기야 변기에 앉아있는 시간은 정말 애매한 시간이라, 장문의 글을 읽기도 뭣한 만큼 스마트폰으로 SNS를 하거나 커뮤니티를 돌아다니거나 포털 사이트를 구경하는 게 가장 적합하긴 하다. 고백하건대, 나도 변기에 앉아서는 트위터를 들여다보거나 칼럼을 한 편씩 읽고 있다. 화장실에서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게 위험한데다 비위생적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나름대로 조심하며 손도 잘 씻으니까 괜찮겠지.


그런데, 내가 정말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변기에 앉았을 때가 아니다. 변기 앞에 섰을 때다. 즉, 남자 화장실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광경들이다. 


정말 놀랍게도, 그리 낮지 않은 빈도로 소변을 보면서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한 손으로 방뇨를 컨트롤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조작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하고 불안할 것 같은데 어떡하면 그럴 수 있는 것인지? 굳이 해야 한다면 할 수야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별로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테러범이 등에 총을 대고 ‘30초 안에 이 사이트를 해킹해 주셔야겠어, 오줌을 싸면서 말이지.’라고 협박하지 않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스워드 피쉬”라는 영화에선 해커인 주인공이 테러범의 권총 앞에서 펠라치오를 당한다는 극한 상황 속에서 엄중한 보안을 해킹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것도 그리 달가운 상황이 아니긴 마찬가지다. 


어쨌든, 소변을 보면서 스마트폰을 보든 말든 그건 개인의 결정이고, 스마트폰을 변기나 화장실 바닥에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눈을 떼면 안 되는 뭔가를 보고 있다면 그건 그만큼 중요한 일일테니까 도덕적으로 문제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방뇨가 신성한 행위도 아니고 꼭 집중할 필요도 없긴 하지만...


그런데 최근에는 마가 낀 것인지 더 기상천외한 모습을 여럿 목격했다. 


일단, 퍽 고급스러워보이는 헤드폰을 끼고, 거기에 연결된 스마트폰을 변기 앞쪽 선반에 올려두고 영상을 감상하면서 소변을 보는 사람. 이건 비교적 안전한 편이고, 즐거워보였으니까 딱히 뭐라 할 말은 없다. 단지 멋진 헤드폰과 방뇨라는 두 개념이 잘 매치되지 않아서 혼란스러웠을 뿐이다. 내가 아는 한 두 개념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은 무라카미 류가 쓴 소설의 SM 플레이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다음으로는 술집에서 화장실에 갔을 때인데, 한 남자가 소변기 앞 선반에 엎드리듯이 기대어 두 손으로 스마트폰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었다. 뭐, 취했으면 거기 서서 게임을 할 수도 있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옆에 서보니 이 남자는 시원하게 방뇨중이었다. 내 눈이 의심스러웠지만, 분명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손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방뇨를 하는 동시에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어린 애들이 하반신의 옷을 전부 끌어내리고 자유롭게 소변을 보곤 하지만, 그는 멀쩡히 옷을 다 입고 있었다. 나는 충격을 잊어버리기 위해 최대한 자신의 방뇨 행위에만 집중했지만, 내가 일을 끝낼 때 쯤 그는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았는지 핸드폰을 선반 위에 놓고 아예 두 팔을 베고 엎드려 버렸고, 나는 그 광경을 도저히 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당시 술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배는 ‘발기한 게 아닐까요?’하고 가설을 내놓았는데, 생각해보면 확실히 의복의 장력을 견디는 상태라면 그게 타당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글쎄, 술집 화장실에서 발기한 채로 소변을 보며 두 손으로 게임을 하다 엎드리는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물론 본인은 딱히 좋아서 발기한 것도 아닐 것이고, 자기가 편해서 핸즈프리로 소변을 보고 있었을 테니 대단한 문제도 아니고, 만약 이 글을 보면 상처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기분상 그렇단 말이다. 애초에 화장실에서는 어떤 생명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어떤 놀라움도 발견하고 싶지 않다. 약간 다른 얘기지만, 남자들은 뜻밖에도 델리케이트한 면이 있어서, 타인의 바로 옆 소변기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경향마저 있는 것이다. 때문에 5개의 소변기가 있을 때 2번이나 4번을 쓰는 것, 그리고 1번을 쓰는 사람이 있을 때 4번을 쓰는 것 등은 다음 사람을 고려하지 않은, 그러나 누구도 지적할 수 없는 사소한 비매너 행위로 간주되는데… 음, 이건 정말 딴 얘기군.


각설하고, 술집 화장실에서 받은 충격을 다스리며 일주일 쯤 보냈을 때였다. 도서관 화장실에 들어가니 그럴듯하게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신사분이 반듯하게 서서 두 손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과연 도서관인가, 한국 도서 시장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구나, 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신사분은,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소변기 앞에 서서 방뇨 중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댄스댄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친구 고탄다가 소변을 보는 모습마저 멋있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문장을 체현한 듯한 신사였다. 노르웨이의 전나무보다 더 곧고 반듯한 자세라 나도 모르게 '어른이 되면 나도 저렇게 멋진 신사가 되어야지', 하고 생각할 법한 분이었다. 소변을 보는 중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니, 소변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둘 중 하나만 하고 있었더라도 별 문제 없이 멋진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 신사분은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고 멋진 자세로 일을 보고, 옆구리에 책을 낀 채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갔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각박함이 사람들을 이 정도로, 소변 보는 시간조차 뭔가를 하도록 몰아넣고 있는 것일까? 수불석권이라는 사자성어가 있긴 하지만, 이런 일들을 목격하고 나니 그다지 긍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흔히 어떤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할 때 그 행위를 모든 사람이 한다고 생각해보라고 하는데, 남자화장실에서 모든 사람들이 방뇨하며 스마트폰을 보거나 반듯한 자세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기이해서 도저히 그들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을 것 같다. 손 씻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넉넉히 1분 정도는 보던 걸 내려놓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게 분명하다. 무한한 정보의 세계가 멋지긴 하지만, 어쩌면 눈앞의 즐거움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우리는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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