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위가 좋아하는 위스키

-나의 오랜 주치의를 떠나며

by 이건해

공모전에 연달아 떨어지고 여기저기서 엉덩이를 걷어차이는 요즘처럼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는, 독주를 마신다는, 러시아 문학의 거장 같은 습관이 있다. 당연히 그 어떤 면에서도 추천할 만하지 않은 짓인데, 푼돈으로 이것저것 마셔본 경험으로는 역시 위스키가 제일이다.


위스키는 일단 적당히 독하다는 게 장점이다. 독주를 꺼리는 사람이 듣기엔 40도를 ‘적당히’라고 표현하는 일에서 거부감과 허세를 느낄 것이다. 실제로 소주의 도수도 와인 수준까지 내려갈 기세로 빠르게 낮아지는 추세인 만큼 40도는 독한 게 맞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를 서서히 마비시키려는 목적 하에선 이 정도가 딱 적당하게 느껴진다. 이보다 더 독하면 목구멍에서 턱턱 걸리는 느낌이 들어 편치 않은데다 잘못하면 속이 뒤집힐 수 있고, 이보다 약하면 너무 잘 넘어가 금방 취해버린다. 40도의 위스키 정도로 적당히 독해야 ‘나는 지금 독한 술을 마신다’는 실감 아래 조심스럽게 음미하면서 두뇌를 적절히 마비시킬 수 있다.


독한 술을 마신다는 실감이 왜 중요하냐고? 그런 실감 없이 술을 술술 마시면 ‘자고 일어나기 전까진 정상적으로 거동할 수 없게 되는 한계선’을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뒤엔 전두엽이 마비되어 절제를 잊고 퍼마신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기 마련이다. 옛날에는 주로 술을 마셔본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학교 신입들이 이런 지경에 처하곤 했는데, 잘 넘어가는 술을 마시다 보면 음주 경력이 제법 되더라도 이 선을 넘어버린다. 부끄럽게도 나는 복학하고도 한참 지난 뒤에 후배 한 명이 가져온 고급 위스키를 좋다고 마셔댔다가 화장실까지 가지도 못한 채 동아리방 앞의 공용 쓰레기통을 부여잡고 속을 완전히 뒤집어 비운 적이 있다. 참으로 추접스러운 짓이었고,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조차 나를 딱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뒤로는 절대 선을 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귀한 술이 과도하게 있는 자리에서, 나같은 기회주의적 음주자가 보이지 않는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하며 술을 마시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 몇 번이나 추태를 벌이고 말았다. 이 선을 잘 지켰다면 내 인생도 90도쯤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덕분에 독한 술은 독한만큼 마시기 힘들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 되었다.


그러나 위스키는 독하기만 한 게 아니라 대단히 맛있기도 하다. 독하기만 하고 맛이 없다면 그건 술이 아니라 약이나 독일 테니 당연한 얘기인데, 각자의 개성을 가진 여러 술 중에서도 위스키는 각별한 확고한 지위를 갖고 있다. 점도가 있을 것처럼 진한 호박색으로 아름다운 이 술은 향긋하고 달큰하면서도 입안에서 묵직한 느낌을 준다. 목을넘기면 잠깐 숨을 막히게 할 것 같으면서도 개운하고, 맛이 진한데도 뒷맛이 입에 치덕거리지 않는다. 차게 식혀서 먹어도 속은 뜨거워진다. 오묘하고 깊으며 복합적인 맛이다. 아름다운 문체 속에 비유와 상징이 흩뿌려진 소설처럼, 이런 술은 천천히 음미해 마시는 게 제격이다. 물론 온더록으로 맛의 스펙트럼이 퍼지는 걸 즐기는 것도 좋긴 한데…… 나는 얼음을 갖고 오는 것도 귀찮고 술의 실감을 약화하는 것도 단점이 크다 싶어 그냥 마실 때가 많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니코틴을 안주삼아 냅다 병나발을 불기도 한다. 위스키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애주가가 보면 뒤통수를 때리고 싶은 꼬락서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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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일본어번역가. 황금가지 공모전 우수상 수상. 브런치 출판프로젝트 특별상 수상. 2024년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공모전 단편 우수상 수상. 협업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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