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은 고기를 싣고

-지속 가능한 여름철 식사의 이상향

by 이건해

어릴 때는 냉면의 맛을 잘 모르고 살았다. 물론 우리집은 외식도 거의 하지 않고 배달음식도 일절 먹지 않으며 나도 다양한 음식 먹는 일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 먹을 일도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아주 드물게 기회가 생겨 냉면을 먹어도 그 밍숭맹숭함에 여간 의아하지 않았다. 굳이 왜 이런 맛도 희박하고 배도 부르지 않은 음식을 비싼 돈 주고 먹는단 말인가……. 비빔냉면은 그나마 매콤달콤새콤한 맛이 있어 나았으나 굳이 나서서 먹겠냐면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한정된 식사의 기회를 소중히 하자면 냉면이 들어올 자리를 내줄 순 없었다. ‘넌 참 좋은 친구지만 사귀기는 좀……’ 혹은 ‘귀하의 우수한 역량을 확인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처럼 싫지 않으나 그렇다고 곁을 내줄 순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한편으로 냉모밀은 좋아했으니, 이것도 좀 이상한 일이다. 냉모밀도 양이 적기는 매한가지고 맛도 심심한데 냉면보다 나을 게 어디 있다고 즐겨 먹었단 말인가? 아마 그것은 냉모밀을 먹을 만할 때에 같이 냉모밀을 애호하고 즐겨줄 사람이 있었던 덕분일 텐데, 냉면을 즐겨 먹기 시작한 것도 이와 비슷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지나서까지 직장인도 작가도 아닌 망령으로서 동아리 생활에 발가락 하나를 걸치고 있던 시절, 주말마다 모여 놀던 친구들이 저녁 메뉴로 냉면을 고르는 일이 점점 늘어난 것이다.


노화가 진행되면서 다들 무겁고 부담스러운 음식을 피하게 된 탓이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학교 근처에 현대 한국 식문화의 정점, ‘육쌈냉면’이 들어온 것이다.


고기를 구워 먹고 입가심으로 냉면을 시켜 먹으면 맛있지만 여차할 때마다 고기를 먹는 건 번거로운 일이니, 냉면을 시켜 먹으면 고기를 끼워주겠다는 이 발상의 전환. 나는 평소에 고기를 먹다 냉면을 먹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어디 한 번 시험삼아 먹어보기나 하자고 먹어본 이 조합에 금방 매료되고 말았다.


슴슴하고 시원하면서도 은근한 감칠맛이 숨어있는 냉면을 먹고, 그러다 불향이 가득한 고기를 하나 집어먹으면 그 쫄깃하고 강렬한 고기맛이 한층 더 부각된다. 그러다 다시 냉면으로 돌아가면 또 개운하고 깔끔해지는 것이다. 싸늘하다 싶으면 컵에 받아온 육수를 홀짝홀짝 마신다. 뜨끈뜨끈하면서도 짭짤한 이 육수의 맛도 여간 중독적이지 않다. 사시사철 싸들고 다니며 즐기고 싶을 정도로 착착 감기고 자꾸 구미가 당긴다. 이렇게 상반되는 맛과 온도를 계속 돌려가며 즐기는 재미란 짬짜면과 고량주를 먹는 것처럼 상보적인 균형을 이루는데, 속이 거북해지거나 취해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건강하게 느껴진다. 지속 가능한 식도락이다. 속이 짜서 물을 켜게 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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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일본어번역가. 황금가지 공모전 우수상 수상. 브런치 출판프로젝트 특별상 수상. 2024년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공모전 단편 우수상 수상. 협업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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