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플레잉을 하지 못하는 내 게임 취향이 마이너하다

by 이건해


남들 못지 않게 게임을 좋아하는 나지만 유독 정통 롤플레잉 게임만은 손을 대지 않게 되었다. 한때는 TRPG를 즐기던 사람이니까 롤플레잉 게임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취향에 충실한, 숭고한 행위가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막상 훌륭한 대작 롤플레잉 게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어도 전혀 끌리지 않는 것이다.


이 현상은 제법 오래된 것이라 2011년에도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다. 4년이 지나도록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셈인데, 요즘 이 게임 저 게임 집적거리다 보니 이유가 꽤 명확해졌다.


일단 롤플레잉 게임이라는 게 고작 몇 시간 해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시간적으로 문제가 있다. 할 시간이 없다기보다는, 그 시간에 영화나 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게 이야기를 즐기는 방식으로는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주 치밀하고 웅대한 세계관을 따라가는 것도 이제는 벅차다. 예전에도 적은 내용이지만, 게임이 시작되면서


‘머나먼 옛날, 빛과 어둠이 싸운 끝에 빛은 어둠을 잠재웠으나 그 자신도 큰 상처를 입어 이 대륙에 깃들어(중략) 그러나 평화로운 시절도 다 흘러가고 이제 그 어둠은 눈을 뜨려 하고 있었다’

-같은 얘기를 늘어놓거나 등장인물들이


“으... 여긴 어디지?"
“깨어나서 다행이야. 여긴 슈트라파클라 마을이야. 레인츠하르투가 왕국의 변경에 있는 작은 농촌 마을이지. 난 케이니, 약초상이야. 다친 덴 괜찮아?"
“밖이 시끄럽네, 창밖의 저 군대는 뭐야?"
“너 요즘 소식을 전혀 모르는구나? 이웃 나라인 파리크라투스 제국에서 국제협약을 어기고 대륙간 순양 비공정을 무제한 생산하기 시작해서 이를 제재하기 위한 국제연합군이 결성됐어. 저건 내일 도착할 연합군 본대에 합류할 인원들이야."
“또다시 전쟁이… 벌어지는 건가."
“그래, 안타깝지만 타리우힐 대제의 서거 이후로 중앙의 장악력이 약해지는 바람에 권력 다툼이 심해졌으니까. 제국이 외부에 적을 만들어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그건 그렇고 내 손목의 문신이 빛나고 있어!"
“그건 유리센느 여신의 탈리스만? 인간 주제에 내 영혼석에 반응한 거야?!"


-같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숨이 벅찰 지경이다. 옛날 같으면 새로운 개념 하나하나에 감탄하고 자세히 알아보려고 안달을 했겠지만, 이제는 좀 천천히 가자고 빌고 싶어진다. 재미난 세계관이나 새로운 개념들을 익히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어도 일단은 익숙한 것에 발을 붙인 상태에서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도때도없는 전투에 이제 완전히 지쳐버렸다. 애시당초 게임이 맵 이동 없이 전투의 반복으로 이루어지거나, 이동과 전투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라면 괜찮다. 아니면 전투 후에 짧더라도 나름대로 재미난 얘기가 이어지거나, 하다못해 전투를 피할 수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무작위 전투를 즐기는 사람이 더 많은 모양인지, 마을을 나서서 걷다 보면 별안간 화면이 아찔해지더니 고블린이나 슬라임 따위와 싸워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기치 못한 적의 습격이야 물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디로 좀 갈라치면 전투로 돌입해서 맥을 끊어먹는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목적을 가로막는 뚜렷한 난관이라면 모를까, 보이지도 않고 피할 수도 없고 특별히 중요하지도 않은 전투를 반복하면서 적을 공격하고 체력이 떨어졌다고 회복할 뿐이라면 적어도 나는 도통 재미를 느낄 수 없다.


중세 기반의 보편적 정서는 무척 반갑지만, 시작부터 하는 일이 레벨노가다라면 헬조선의 노력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옛날에 했던 “용과 같이”는 퍽 잘 만든 롤플레잉 게임이었다. 파티를 짜서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은 아니어도 캐릭터를 성장시키면서 그 캐릭터를 둘러싼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니까 롤플레잉으로 봐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 게임은 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까 복잡한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거리를 다니자면 불량배들이 시비를 걸어오는 일도 있지만 현실에서 그럴 수 있듯이 뛰어서 도망쳐 버릴 수 있다. 그리고 게임의 길이도 질려버릴 정도로 길지 않은 데다 짧고 재미난 이벤트가 곳곳에 숨어있어 ‘아가씨가 잃어버린 고양이만 찾아주고 끝내야지’ 하며 짧은 호흡으로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시리즈는 기회만 된다면 다 해보고 싶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전투 양상이 롤플레잉 게임에만 나오는 건 아닌 것 같다. 바하무트 이후로 목적도 없이 제자리를 행군하는 군인처럼 맵을 클릭해서 걷고 또 걷다가 전투가 발생하면 덱이 알아서 작동해서 싸우고 결과를 보여주는 게임이 정말 무지막지하게 많이 나왔다. 이 게임들 역시 만족할 수 없었다. 카드를 모으는 게 가장 중요한 재밋거리라는 건 알겠지만 내가 버튼 하나를 클릭하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게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든 말든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게임들도 세상에서 잘만 팔리고 있고, 그럴 볼 때면 내 게임 취향이란 점점 유행에서 동떨어져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고 복잡한 설정과 반복적인 전투와 카드 수집 등을 즐기고 있는데 나 혼자 진짜 게임이란 그런 게 아니지, 하고 억지를 부린 끝에 보편적인 게이머의 정서를 영영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 때면 유행하는 모바일 게임을 설치해서 해 보곤 하는데, 그렇게 해봤자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노동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결국은 지워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 참 큰일이다.


(2015.01.28.)



-후기


스카이림도 얼마 하지는 못했지만 재미있게 즐긴 롤플레잉 게임이었습니다. 길바닥에 슬라임 따위가 즐비하게 돌아다녀 일일이 잡고 다니는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고,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도망칠 수도 있었을 뿐더러, 어딜 가도 새로운 모험과 이야기가 벌어졌죠. 악착같이 따라가야한다는 부담은 없는 것들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가진 꿈 중 하나가 언젠가는 다시 스카이림을 핥듯이 즐기는 겁니다. 죽기 전에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고보니 롤플레잉 게임의 태생적인 문제 중 하나로는 볼륨이 방대해서 짬짬이 할 수가 없다는 게 있군요. 볼륨을 좀 줄이고 액션성 같은 걸 늘리면 필연적으로 의미없는 노가다 비중이 높아질 수밖에 없죠. 뭐 결국은 그 노가다를 얼마나 재미있게 만드느냐가 현대 모바일 롤플레잉 게임의 과제겠습니다만, 저는 어느쪽으로도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난 것 같습니다.


(201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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