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유출이 우리 집 문턱을 넘을 때
새벽 4시, 문밖 복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예전 같으면 ‘로켓’처럼 도착한 택배 소리에 안도하며 다시 잠을 청했을 소리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불 속에서 저도 모르게 숨을 죽입니다. 저 문밖의 인기척은 나의 주문을 배달하러 온 기사님일까요, 아니면 유출된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고 찾아온 낯선 타인일까요?
열쇠 없는 시대의 공포
우리는 더 이상 열쇠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대신 네 자리 또는 여섯 자리 숫자가 우리를 지켜줍니다. 그런데 며칠 전 뉴스를 통해 그 숫자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 옆에 우리 아파트 공동 현관 비밀번호가 엑셀 파일의 한 칸에 나란히 적혀 떠돌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디지털 세상의 ‘해킹’은 늘 뉴스 속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내 통장의 잔고가 위협받거나 스팸 문자가 늘어나는 정도의 문제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다른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데이터가 내가 잠든 사이에 물리적으로 내 집 앞까지 침입할 수 있다는 ‘실체적 공포’로 다가온 것입니다. 나의 디지털 정보가 뚫리는 순간, 나의 물리적 요새도 함께 함락된 셈입니다.
장바구니에 담긴 벌거벗은 자아
물리적인 위협만큼이나 저를 괴롭히는 것은 함께 유출된 ‘주문 내역’에 대한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이 무엇을 샀는지 누가 관심이나 있겠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장바구니만큼 나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SNS에 올리는 사진은 편집된 일상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도 있지만, 사실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결제를 완료한 내역은 다릅니다. 내가 지난달에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사이즈의 속옷을 샀는지, 탈모 샴푸를 주문했는지, 혹은 우울증 관련 책을 읽었는지 등 플랫폼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데이터가 유출되었다는 것은 마치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광장에 나의 일기장을 찢어 뿌린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는 그 목록을 보며 나의 질병을 추측하고, 나의 경제적 수준을 가늠하며, 나의 은밀한 취향을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디지털 공간에서 저는 옷을 입지 않은 채 벌거숭이로 어정쩡하게 서 있게 된 셈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를 바라보는 그 누군가의 시선은 현실이 되어, 나는 수치심과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편리함이라는 인질극
우리는 ‘로켓’ 같은 속도에 어쩔 수 없이 매료된 것 같습니다. 문 앞에 물건이 놓이는 마법 같은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란에 적어 넣었습니다. “배송을 위해 필요합니다”라는 말에 의심 없이 가장 사적인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합니다. 디지털(Digital)과 피지컬(Physical)의 경계가 무너진 ‘피지털(Phygital)’ 세상에서 우리는 이제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온라인의 방화벽이 무너지면, 오프라인의 현관문도 열리기 마련입니다.
이제 나는 여러 비밀번호를 바꾸어 봅니다. 하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바꾼 비밀번호 역시 다음 번 배송을 위해 어딘가에 저장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편리함이라는 인질극에 가둔 채 수익만 창출해 온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들의 관리 책임이 얼마나 중차대한지, 우리 모두가 새삼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현관문 도어락의 숫자를 누르는 손끝이 오늘따라 유난히 떨립니다. 누군가가 내가 벌거벗은 채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