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의 시와 AI가 만나는 겨울 오후
겨울 눈이 조용히 내리는 날이었다. 창밖의 소음은 잦아들고, 공기의 밀도만이 묵직해진 듯한 오후. 나는 책장에서 최승호의 시집을 꺼내 「눈사람 자살 사건」을 다시 읽고 있었다. 왜 하필 그날 그 시를 펼쳤는지는 나도 모른다. 눈이 내리면 눈사람을 떠올리는 것쯤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연상이니까.
욕조에 누운 눈사람은 고민한다.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하지만 살아야 할 이유도,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뜨거운 물이든 찬물이든 결과는 매한가지다. 빨리 녹느냐 천천히 녹느냐의 차이일 뿐, 어차피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으니까.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잠이 든다. 선택의 윤리를 묻기보다 물성의 운명을 묵묵히 수긍하는 이 시 앞에서, 사라짐은 의지가 아닌 조건의 문제로 다가온다.
시를 덮고, AI로 눈사람을 그려보았다.
'만든다'는 표현이 맞는지 잠시 망설여졌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프롬프트를 입력했고 알고리즘은 무수한 가능성을 계산해 냈다. 욕조에 누운 눈사람. 미소 짓는 표정. 황금빛 촛불. 수증기가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욕실. 시의 장면을 재현한 듯 보였다.
그런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눈사람은 녹지 않는다.
시 속 눈사람이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다" 잠들었다면, AI의 눈사람은 데이터 속에 박제된 채 영원히 머물 뿐이다. 내일 다시 열어도, 한 달 뒤 다시 열어도, 이 눈사람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촛불은 꺼지지 않고, 수증기는 흩어지지 않으며, 몸은 한 방울도 줄지 않는다.
그 순간 시의 문장이 다르게 읽혔다.
소멸이 거세된 존재 앞에서, 역설적으로 흔들리는 것은 인간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매 순간 상태가 변하고, 선택하지 않아도 조건에 의해 소모된다. 피부가 마르고, 기억이 흐려지고, 체온이 오르내린다. 반면 AI의 눈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녹는다는 사건 자체가 삭제된 존재다.
이 차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문제다. 시가 말하는 자살은 죽음의 행위가 아니라 녹아 사라지는 과정에 대한 관찰이다. AI의 눈사람은 그 과정을 겪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사라짐의 의미를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언제든 다시 불러올 수 있는 눈사람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녹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눈은 계속 내렸고, 화면은 꺼졌다. 나는 다시 시의 첫 문장을 떠올려 본다.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아무 이유 없이 그 자리에 있던 눈사람.
AI는 녹지 않는 눈사람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눈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녹지 않아서가 아니다. 녹지 않는다는 사실이, 녹는다는 것의 의미를 비로소 선명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창밖의 눈은 쌓이는 족족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무심함이야말로, 겨울에 읽는 이 시와 오늘의 AI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HTWnFhJfz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