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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Aug 02. 2021

취미는 못해도 귀엽다

슬기로운 밴드생활

인생에서 취미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해본 건 아마도 한창 자소서를 쓰던 취업 준비 기간인 것 같다. 처음 취미란 옆의 공백을 마주하고 한참을 뭘 써야하나 머리를 싸맸던 기억이 난다. 취업에 대한 열망이 낳은 내 취미는 '공상'이었다. 


사실이긴 했다. 이 상상에 저 상상을 얹는 일들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 하지만 당시 내 딴에는 또 나름대로 전략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독서나 영화 감상 같은 뻔한 대답 대신 괜히 남다른 뭔가를 쓰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나는 일상에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와 소재를 고민하는 스토리텔러적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라는 점을 위트 있게 어필하고 싶었다. 웃기는 계산이 담긴 두 글자였다. 그렇게 말장난 같은 취미 고민을 끝내고 일을 시작한 후로 몇 년 간은 사실 별로 취미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러다 작년 5월 동네 실용음악학원에서 기타를 배우게 되었다.




기타를 배운지 얼마 안됐을 무렵,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밴드를 제안했다가 농담이 진담이 되어 진짜 밴드를 하게 되었다. 드럼을 조금 칠 줄 아는 친구, 원래 노래를 잘부르는 친구, 베이스는 한번도 안쳐봤지만 제발 같이 하자고 하니까 얼렁뚱땅 합류한 친구가 모여 넷이 밴드를 시작했다.


홍대 합정 구석구석 합주실이 그렇게 많은줄은 처음 알았다. 프로 뮤지션들만 이용하는 줄 알았던 합주실은 그냥 네이버 예약으로 날짜와 시간을 골라 예약하면 되는, 문턱이랄게 별로 없는 공간이었다. 악기가 없으면 악기도 빌려준다. 여전히 합주실 직원이 기타 톤 세팅 같은 어려운 걸 갑자기 물어보면 능숙한 척에 실패하지만 이제 합주도 그런대로 익숙해졌다. 그렇게 밴드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기타라는 낯선 악기를 배우며, 나에게는 모든걸 다 멋지게 잘하고 싶다는 어이없는 욕망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웃기지도 않는 이 자의식이 탄생한 건 아마 못하는 건 그냥 안하고 말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릴 때 피아노를 곧잘 쳤으니 기타도 알아서 잘칠 거라고 섣불리 기대했다. 그러나 건반 하나를 누르면 적어도 그 음만은 따박따박 나던 피아노와 달리, 기타는 손가락을 아무리 기괴한 모양으로 해봐도 꼭 어느 한군데 잘못 눌린 줄이 생겼고 그럼 초라한 소리가 났다. 손가락 마디 끝이 자주 아팠고 굳은살은 생겼다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적은 노력을 들여 천재처럼 잘하고싶다는 중2병적인 욕망은 그렇게 일찌감치 망상이라고 판명났고, 못하니까 안하기엔 그냥 그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기타 줄은 대체 왜 굳이 손 아프게 이런 소재로 만든 것이며, 밴드곡 기타 악보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어려운 걸까 싶었지만... 그 모든 걸 극복하기 위해 대단한 투지와 눈물 나는 노력을 보여줬나, 하면 사실 그건 아니었다. 그냥 나를, 우리를 위로해주는 주문같은 말을 외치곤 했다.


취미는 못해도 귀엽다!

정말 이 말을 하면 그 모든 어설픔이 자연스러워졌다. 내가 지금 기타로 돈을 벌자는 것도 아니고 내 선율로 누구가에게 대단한 감동을 주자는 것도 아니다(언젠가 주면 좋겠긴 한데). 나 좋자고 하는 일, 그저 친구들과 모여 반은 연습하고 반은 깔깔대다 오는 그 1-2주에 한번 있는 몇 시간이 내 일상을 지치지 않고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니, 못해도 귀엽다는 마음을 장착하는 거다. 돈 받고 하는 일은 못하면 안귀여울 테지만, 그리고 사실 취미를 못해도 나를 귀여워해주는 건 나 자신뿐일테지만, 실수하면 안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그냥 되는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생겼다는 게 재밌었다. 일상에 그런 것들이 많아지면 조금은 풀어지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못한다고 창피하다고 영영 이 즐거움을 모르고 살 수는 없다. 


일을 시작하고나서, 들이는 노력과 나오는 결과가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자주 좌절했다. 때론 다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기타는 조금씩 정직하게 들이는 노력만큼 는다. 그 점이 고마웠다. 조금씩 꾸준히 하다보면 절대 안잡힐 것 같던 코드가 어느새 잡히고, 절대 무리라고 생각했던 곡이 많이 덜컹이긴 하지만 어찌저찌 굴러간다. 여전히 내 기타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가 나지만, 찍어놓은 영상을 보면 또 영 제자리걸음은 아니라는 생각에 성취감이 느껴지고 그런다. 겨우 F코드가 잡히나 싶으면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나곤 하지만 그건 아마 대부분의 밴드곡이 다 왕천재 프로페셔널 기타리스트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 아닐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취미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1.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그러니 정말로 취미는 못해도 귀엽다! 반박 안받음.


딩가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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