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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Aug 02. 2021

우리 잘 살다 어느 길에서 또 만나요

<노매드랜드>(2020)를 봤다

<노매드랜드>는 아카데미, 베니스 등 세계 유수 영화제를 석권 중인 단연코 올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이다. 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이 남편과 사별 후 혼자 밴을 타고 광활한 미국 땅을 떠돌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담담히 그린 영화다.


펀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정상성의 궤도에 벗어나 밴이나 카라반을 타고 미국 땅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아간다. 이 작품의 원작 논픽션도 금융위기 이후 차에서 살게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던 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100%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건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인다. 밴에서 오줌을 누고, 주차를 하다 쫓겨나는 구질구질한 삶의 그늘도 가감 없이 보여주지만, 이들은 집이 없는 상태인 것이지(houseless), 홈리스(homeless)는 아니라는 말로 스스로의 삶을 설명한다.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형태로 살아가려 애쓰는 존재들을 보고 있노라면 애틋하기도 부럽기도 안타깝기도 하다.


                                                                    

러닝타임 내내 영화를 감돌던 석양의 붉은빛만큼이나 내게 강렬하게 남은 건 영화 속 대사 한 마디였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 며칠 동안이나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there's no final goodbye, just see you down the road."

(영원한 작별이란 없죠, 대신 '또 만나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내 맘대로 의역


유랑자들의 정신적 지주 같은 밥 웰스의 대사이다. 이별의 상황에서 그는 펀에게 영원한 작별이란 없다며, "see you down the road"라는 말을 남긴다. 이 길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다가왔다. bye가 마침표라면 see you down the road는 낙관이 섞인 여운을 남긴다. 우리 잘 살다가 어느 길에서 또 만나요.


유랑을 시작한 펀의 삶은 정착생활을 하던 때와 모든 게 다르다. 당황스러운 순간 예상 밖의 귀인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하고, 반대로 혼자 유지해온 질서가 타인에 의해 산산조각 나기도 한다. 각자에겐 정성껏 꾸미고 가꾼 나만의 공간이 있지만, 동시에 이들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필요해 보이는 것들을 나눈다. 




펀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동안 여행하며 만났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혼자 다니는 여행을 좋아해 겁 없이 이곳저곳을 다녔다. 내 맘대로 어디든 원하는 속도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편했다. 동시에 나 말고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여행길의 큰 위안이었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만날 일이 없었을 사람들과 하루 이틀을 동행하기도 했고, 밥 한 끼를 같이 먹기도 했다. 별 계획이 없는 날은 그냥 그날 동행자의 일정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인연은 주로 같은 게스트하우스의 방이나 거실에서 시작되었다. 둘 중 누구든 좀 더 용기 있거나 좀 더 침묵을 못 견디는 사람이 안부 인사를 건넨다. 혼자 먹기엔 많지만 그래도 맛집이라 어떻게든 가야만 할 것 같은 곳에 같이 가기도 하고, 용건 없이 광장에서 밤늦도록 버스킹을 구경하고 숙소에 오는 길에 함께 그 멜로디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서로 인생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혼자 가기엔 무서운 동네를 가보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누비기도 했고, 밤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모녀에게 맛집을 추천받기도 했고, 그 맛집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기도 했다.


여행은 그렇게 만난 사람들 덕분에 한층 풍성하고 황당하고 재미있었다. 이름도 얼굴도 이제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여전히 sns 친구로 낯선 일상을 나누는 사람도 있다. 서로의 글에 좋아요를 눌러주며 느슨하게 연결되어 지낸다. 





이 영화도, 내 여행도 결국 다 삶의 은유라면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들도 결국은 여행길에서 우연히 동행하게 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르겠다.


'외로움'은 오랫동안 내 삶을 지배해온 화두 중 하나였다. 감정이라 해야 할지, 상태라고 해야 할지 모를 그 정체불명의 단어는 자주 나를 괴롭혔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리거나, 서서히 멀어지는 인연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가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못하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랬다. 소중한 관계들을 잘 유지하고 싶었고, 좋은 시절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고, 타인이 내 맘 같았으면 했다. 몇 차례 관계의 부침과 겪고 싶지 않은 상실을 지나며,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그 누구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당연한 명제에 도달했다.


한때는 그게 눈물 나게 외로웠다. 저마다 겪는 일들이 달라지고 그걸 겪어내는 마음 역시 달라지고, 꺼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구석이 생기고, 큰 맘먹고 꺼내어 봐도 상대에겐 그 모양이 내가 보는 것과 같지 않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매일 서로를 좀 더 외롭게 만들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며 좌절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밴 같은 혼자 가꿔온 공간이 있고, 타인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무게의 짐을 진채로 걸어 나간다는 걸, 머리로라도 받아들인 다음부터는 모든 게 좀 더 쉬워졌다.


서서히 멀어지거나 순식간에 사라지는 관계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겨나겠지만, 그럼에도 그 사람들이랑 좋았던 순간들마저 다 지우고 싶지는 않다. 인생의 어느 한 시절 어느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과 같이 잘 놀다 길이 달라 헤어졌지만, 또 삶의 어느 우연한 골목에서 눈 동그랗게 뜨고 다시 만나 동행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노매드랜드> 속 펀이 만난 인연들이 그랬고, 내가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랬다. 이미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들도 이 모든 길의 끝에선 만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점에선 그저 낙관하고 싶고.


다이나믹 듀오의 노래 제목처럼 여전히 '가끔씩 오래 보자'는 말과 함께 헤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매일같이 보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연례행사처럼 만나게 될지 모른다. 같이 공감하며 나눌 수 있는 고민들이 줄어들고, 지금은 얼굴만 봐도 좋아 죽겠는 사람들을 영영 안 보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가끔'도 '오래'도 힘들어지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 그 사람들이랑 같이 길을 걸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섣불리 굿바이라는 인사는 건네지 않겠다. 대신 모두에게 "see you down th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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