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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Aug 08. 2021

휴가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

자발적 고립의 시간을 보내며

철새들이 쉬어간다는 서해의 작은 섬 외연도에 나도 쉬러 와있다. 5박 6일 일정으로 오랜만에 긴 휴가를 냈다. 숙소 문을 열고 열 발자국을 걸어 나가면 바다가 보인다. 이게 바다였지, 이게 하늘이었지, 새삼스럽다. 이 글을 손으로 썼다면 아마 종이에는 바닷바람이 배었을 것이다.


글을 다 쓰는 대로 잠시 밤바다를 보러 나갈 계획이다. 달도 없는 흐린 밤이라 보이는 건 암흑뿐이겠지만 파도 소리만으로도 바다가 느껴져 마음이 놓일 테다. 굳이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미래의 내가 지금의 상황을 무척 그리워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최대한 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현재를 다 기억하고 싶다.


관광객들에게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별 정보가 나오지 않는 섬 외연도를 휴가지로 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모든 게 낯선 해외를 여행하던 기분을 조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반, 그냥 다 모르겠고 사람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반이었다. 기대보다 더욱 새롭고 한없이 여유로운 매일을 보내는 중이다. 몇 차례 업무 전화가 왔지만 자잘한 스트레스에 과몰입하지 않을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되어서인지 전화를 끊는 즉시 다시 휴가자 모드를 이어갈 수 있었다.


언제 봐도 늘 새로운 파랑


꼭 들러야 될 명소도, 꼭 가봐야 할 맛집도 없는, 심심하다면 심심한 섬에 오로지 휴식을 목적으로 휴가를 떠나오니 내가 이런 목적 없는 여행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리워했는지, 휴가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1. 생각이 단순해진다.


일상에서는 생각할 게 많다. 아무리 카테고리를 나누어 잘 정리하려고 해도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수십 가지의 자잘한 생각들이 기본적으로 깔린다. 삶에 대한 심오한 고민부터 일과 관련된 크고 작은 고민, 혼자만의 공간과 일상을 유지해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법한 고민 등이 사방에 산적해있다.


여행에 오면 심플한 사람이 된다. 그 모든 고민들은 나도 모르게 일상의 공간에 두고 온다. 여행이 끝나고 생각하면 된다. 늘 달고 다녀서 무거운 줄도 몰랐던 짐들을 잠시 내려두고 '진짜 나'인 본체만 떠나온 기분이 든다. 이보다 더 가벼울 수가 없다.


지금 하는 고민이라곤 다음 끼니에 대한 고민이나, 다음 산책길에 대한 고민 같은, 틀어져도 그만인 것들 뿐이다. 망해도 추억이다. 리스크가 거의 없다. 가보지 않은 길도 딱히 후회되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서 나의 존재 목적은 휴식이고 휴식은 현재 진행형이니까.



2. 눈이 편해졌다.


휴가가 시작되고 가장 크게 몸으로 느낀 변화는 눈 통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늘 그랬듯 대단한 영감이 떨어지거나 오래 품고 있던 숙제가 해결되는 드라마틱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가장 큰 변화가 눈 통증 완화라니 멋도 없다. 근데 고맙다.


일도 여가도 대부분 휴대폰과 컴퓨터 속에 있다 보니 눈이 자주 아팠다. 뻑뻑하다는 표현도 적당하지 않았다. 눈이 나를 공격했다. 자꾸만 따갑고 시리고 눈물이 고였다. 눈이 아파서 찡그리다 보면 머리도 아팠다. 게다가 유독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퇴근 후에도 내내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눈을 피곤하게 한 뒤 눈이 아파 강제로 잠에 드는 건강에 유해한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이 루틴(?)을 지난주 내내 반복했다. 구독 중인 유튜버의 새 영상도, SNS에 올라오는 새 글들도 이미 다 봤는데 계속해서 새로고침을 해가며 재밌지도 않은 것들에 굳이 머리를 담그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여전히 카톡을 하고 인스타 스토리를 올리지만 의미 없이 새로고침을 튕기는 빈도는 훨씬 줄었고 섬 산책을 하며 보는 풍경은 산 아니면 바다다. 여가라고 해봐야 숙소 마당의 강아지 뭉치와 마루랑 노는 것, 아니면 챙겨간 기타를 어설프게 튕기는 것. 풀색 바다색 일상은 역시 눈 건강에 좋다.



3. 궁금하고 재밌다.


섬에는 누가 일부러 심은 건지 스스로 자란 건지 모를 노란 꽃이 가득 펴있다. 오랜만에 네이버 꽃 검색을 이용했다. 카메라로 찍기만 하면 꽃 이름을 알려준다. 어떤 기술을 어떻게 이용해서 찾아주는 건지 감도 안 왔다. 유채꽃이라고 했다. 혹시 몰라서 숙소 사장님에게도 물어봤다. 갓꽃이라고 한다. 역시 기술은 한계가 있다. 갓김치 할 때 그 갓이라는 부연 설명을 들었다. 


평소 같으면 걸어 다니는 길에 꽃이 피어있어도 굳이 그 이름을 찾아보거나, 두 번 물어 원래 이름을 찾는 일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여행을 오면 사소한 것이 궁금하다. 동네 떠돌이 개의 역사가 궁금하고, 반찬으로 나온 나물 이름이 궁금하고, 숙소 사장님의 창업기가 궁금하다.


매일 카메라를 들고 다니니 재밌을 일도 많다. 재밌어서 찍는 건지 찍기 위해 재미를 발견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오늘은 슈퍼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이 알고 보니 닭장인 게 재미있어 사진을 찍었고, 저녁을 먹은 추억식당 앞 고무 대야들에 흰 페인트로 감흥 없이 대충 쓰여있는 '추억' 글자들이 웃겨서 또 찍었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을 일들에 웃음이 나고 카메라를 들게 된다.


그렇게 투박한 추억들이 쌓이고




이곳에서 두 밤 더 자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 사실에 잠시 한숨 나다가도, 다시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잘 살아볼 용기 비슷한 게 또 생긴다. 맨날 당하고도 그런다.


워셔액으로 와이퍼로 아무리 닦아도 영 개운하지 않던 창문을 차에서 내려 물걸레로 힘주어 닦은 기분이다. 눈앞이 조금 개운해진다. 분명 또다시 먼지가 쌓이고 어디서 생긴 건지 모를 새 얼룩들이 생기겠지만, 지금 이 휴식의 감각과 여유를 잊지 않고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정 답답하면 또 내려서 박박 닦아야지 뭐 별 수 있겄어유, 싶고.



2021.5.20. 외연도에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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