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련 Aug 11. 2021

확실한 패배 앞에서 우리는

2021 도쿄 올림픽이 남긴 것

올림픽 같은 국제 스포츠 대회에 크게 열광하는 편은 아니다. 김연아나 박지성 같은 유명 선수들이 출전하는 경기나, 이미 예선을 통과해 메달권이 유력해 보이는 검증된 경기 정도만 봤다. 이번 올림픽도 제대로 본 건 딱 두 종목, 남들도 다 봤을 것 같은 양궁과 배구였다. 보통 그런 마음으로 스포츠 경기들을 보면 선수들이 내는 성과들만 눈에 띄곤 했다. 흠잡을 데 없는 트리플 악셀이라든가, 팀에 금메달을 안겨줄 결정적 역전골 같은 것. 그러나 이번 올림픽에서 유독 마음에 남은 순간들은 특이하게도 패배가 확실시된 세트나 패색 짙은 상황들이었다.


양궁처럼 마지막 한 발을 쏘기 전에 이미 세트의 패배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종목이 있다. 완전히 진 세트에서 마지막 한 발까지 최선을 다하는 마음은 뭘까? 경기의 기세를 위해서도 있겠고 지켜보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도 있겠지만, 스포츠 문외한인 내가 보기엔 어쨌거나 이미 진 세트였다. 그 한 발은 대충 버리고 집중력을 아껴 다음 세트를 노리는 게 나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선수들은 이미 패배한 세트의 마지막 한 발도 결정적 순간의 한 발처럼 신중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배구도 마찬가지였다. 2:0 상황의 세 번째 세트, 패색이 짙은 상황이었다. 점수는 벌어질 대로 벌어지고 확률로 따지면 이미 99.9%는 진 시점이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선수들은 단 1점을 지키기 위해 위해 몸을 던졌다. 사실상 경기는 끝났다며 내가 점심 메뉴를 고민하던 그 순간에도, 선수들은 실시간으로 필사적이었다. 승패나 메달 보다도 당장 눈앞에 주어진 상황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쓸데없는 계산이나 비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였다. '스포츠 정신'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선수들이 온몸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숭고함이 느껴졌다.


실책을 한 동료에게 다가가 장난을 걸며 격려하는 마음도, 목이 터져라 파이팅을 외치는 패기도, 끝내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으나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고 말하는 얼굴도 좋았다. 이번 올림픽을 보며 처음으로 스포츠에 제대로 관심이 생겼다. 친구들과 국내 배구 경기를 보러 가자며 신이 나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좋아하는 영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2016 리우 올림픽 수영 동메달리스트인 중국 선수가 자신의 기록에 놀라고 만족하며 했던 인터뷰이다. 이 선수는 내일 있을 경기에도 기대를 걸고 있냐는 질문에 본인은 이미 만족스럽다며 상기된 얼굴로 환호하며 자리를 떠난다. 메달 같은 상대 평가의 영역 보다도, 스스로의 기록을 만드는 데 기쁨을 느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JxfhWqbtRw

제가 그렇게 빨랐어요? 너무 만족스러워요!!


이번 올림픽을 보며 ‘1등’ 금메달이 아니어도, 혹은 메달을 따지 못했어도 자신의 성취에 진심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우리나라 선수들의 모습이 전보다 많이 보여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SBS <골 때리는 여자들>도 그렇고 이번 올림픽들도 그렇고, 땀 흘리며 운동하는 여자들의 모습을 TV에서 많이 볼 수 있다는 것도 반가웠다. 내가 워낙 텔레비전 속 롤모델들에 쉽게 흔들리던 사람이었어서 그런지, 뭐든 매체를 통한 가시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양 잊힌다.


아쉽게도 성장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보며 운동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땀을 흘리고 투지에 불타는 멋진 여자들의 모습을 볼 기회가 부족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체육이 멋있었던 적은 없다. 땡볕에 살이 타는 게 싫었다. 체력장을 할 때면 오래 달리기에선 늘 그냥 포기하고 걸었다. 딱히 경쟁심이 들지도 창피하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팀 스포츠는 피구뿐인데, 다른 반 애들과 좁은 코트에서 금을 밟았다 밟지 않았다로 매일같이 다퉜다. 중학교 때는 야구 배트에 공을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체육 선생님한테 맞았다.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억울해서 아직도 기억난다.) 배구가 이렇게 재미있는 경기인지 알 기회도 없었다. 배구를 배우긴 했으나 경기를 한 기억은 없고 팔로 공을 통통 튕기는 수행평가만 봤던 것, 그 팔이 빨개졌던 것만 생각난다.


개인적 불운인지, 교육과정과 미디어의 한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야 다양한 모습으로 운동을 하는 여자들의 모습이 새삼 눈에 보인다. 처음으로 나도 운동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탄탄한 근육과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가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과 한 팀이 되어 같이 땀 흘리는 경험도 해보고 싶다.


일단 기초 체력을 키우기 위한 운동을 등록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걸어 보기로 한다. 고마운 여름의 2021 도쿄 올림픽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휴가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