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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Sep 26. 2021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어느 MBTI 과몰입러의 자기 고백

엠비티아이(MBTI)는 재밌다. 타인이 나를 정의하려 들면 "절 아세요?" 싶어 기분이 나쁘지만, MBTI가 설명해주는 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창피한 진실 같을 때도 뒷머리 긁으며 인정하게 된다. 왜지? 아마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일 테다. 내가 고심해서 답한 문항들을 바탕으로 나를 설명해주니, 사실상 설명의 주체는 나다. MBTI에 대해 말한다는 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별자리나 혈액형보다는 제법 인정할 만한 결과를 제공해준다. MBTI는 과학. 


'나는 창의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야.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넘치는 열정의 소유자야.’라고 말하는 건 낯간지럽고 자의식 과잉 같지만, '나 엔프피(ENFP)야'라고 말하는 건 그보다 조금 쉽다. '나는 관용적이고, 갈등 상황을 잘 해결해.'라고 말하는 건 느끼하지만, 스스로가 엣티피(ESTP)임을 밝히는 건 비교적 담백하다. MBTI에서 파생된 밈들도 무척 웃기다. 함께 MBTI에 과몰입하는 친구들과 서로의 유형을 외워 웃긴 이미지 같은 걸 공유하기도 한다. MBTI별 궁합이나 어울리는 직업, 화나게 하는 법, 이상형, 희망 편/절망 편 등 콘텐츠는 무궁무진하다.


그런 콘텐츠들을 보며 다른 유형의 사람들은, 나로선 할 수 없는 선택들을 한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덕분에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 막연한 답답함을 갖기보다는 그냥 나와 다른 MBTI를 가졌나 보군, 하고 넘어갈 줄 아는 성인(成人 그리고 聖人?)이 되었다. 진작에 이렇게 사람이 다 다른 줄 알았으면 이상하다 넘겨버린 무수한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MBTI가 재밌으면 재밌을수록, 부작용도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정의할 기회가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성격의 차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어느 날 약속 취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친구는 당일에 약속이 취소되면 너무 신난다고 했다. 예상치 못하게 일찍 집에 가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생각에 설렌다는 거였다. 나는 정반대였다. 당일에 약속이 취소되면 대체로 기운이 빠진다. 미리 알았다면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일정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 하는 생각부터 든다. 그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공식적으로(?) ‘당일 약속 취소를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같이 얘기하던 친구들이 나와의 약속은 절대 당일에 취소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러자 그때부터는 정말로 다른 누군가 나와의 약속을 급하게 취소하기라도 하면 평소보다도 더 아쉽고 화가 났다. 취소한 사람의 사정보다는, 내가 이런 사람인데 이런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했으니 기분이 나쁜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나쁜 감정에 당위를 부여했다. 마침 피곤해서 집에 일찍 들어가 쉬었으면 됐을 날에도 왠지 기분이 나빠야 할 것 같았다.




나를 설명하는 말들이 때론 용기를 준다는 걸 안다. 나만의 것이라 생각하면 외로울 감정들이, 실은 16가지 유형 중 하나의 사람이라면 가질 법한 마음이 생각해버리면 모든 게 조금 편해진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모양의 나에 대해서는 그냥 너무 설명하지 말아볼까 싶다.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모여서 나를 만드는 건 바라지 않는 일이다. 이미 있는 말들에 기대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을 때는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적어보기로 한다.


꽤 오래전부터 휴대폰 메모장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리스트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만 해왔다. 이 글을 쓰면서 드디어 '좋아하는 것' 리스트를 만들었다. 제목 옆에는 귀여운 노란색 하트도 붙였다. ‘싫어하는 것’ 리스트는 그냥 만들지 않기로 했다. 이왕 할 거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여 나를 정의하고 설명했으면 좋겠다. 고민하며 고른 단어들로 내가 좋아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구체화하고 소중히 여기고 싶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속, 좋아하는 것들을 노래하던 마리아의 표정을 떠올리며.


사운드 오브 뮤직(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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