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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Aug 29. 2021

난생처음 수박을 샀다

수박 먹다 갑자기 돌아보는 1인 가구의 삶

재택근무로 집에 있는 날이 길어지니 요새는 매 끼니가 걱정이다. 냉장고를 털어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 고민이 시작된다. 하지만 일주일째 후식만은 걱정이 없다. 냉장고 맨 위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박 덕분이다.


폭염이 계속되며 자꾸만 수박 생각이 났다. 입안 가득 퍼지는 시원함과 함께 갈증이 해소되는 그 감각이 그리웠다. 수박은 나 같은 1인 가구에게는 그림의 떡 같은 과일이다. 막연하게 나중이 되어야 사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동네 마트에서 몇 차례 눈이 갔지만 그 큰 걸 혼자 들고 와서 어마어마한 껍질을 처리하고 통에 차곡차곡 썰어 둘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상하기 전에 수박 한 통을 혼자 다 먹으려면, 후식이 아니라 본 식사를 수박으로 해야 할 것 같았다. 각종 수박 창의 요리를 만들게 될지도 몰랐다. 


수박을 먹고 싶은 마음을 들켜버렸는지 유튜브에선 계속 수박 깔끔히 자르는 법을 알려주고, 배달 어플들은 편하게 수박 도시락을 받아 보라며 광고했다. 온 우주, 까진 아니어도 온 알고리즘이 수박을 먹을 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그럼 먹는 수밖에! 그렇게 지난주 난생처음 내 돈으로 수박을 샀다.





몇 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에세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고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던 건, 많은 사람들이 싱글로 사는 시간을 결혼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여긴다는 내용이었다. 미래의 어느 때에 결혼 등으로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길 것을 가정하여 싱글의 삶은 '진짜' 궤도에 오르기 전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물건을 살 때도 자연히 길지 않은 시간을 쓸 것을 사게 된다는 거였다. 아직 결혼에 별 생각이 없었지만, 나도 은연중에 많은 선택들을 그런 식으로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통일성 없는 가성비 가구들이라든가 나중에 언젠가 해봐야지 하고 미뤄두는 일들이 그랬다.


저 깨달음은 무척 인상적이었고, 작년에 지금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인테리어를 고민할 때 종종 생각이 났다. 가구부터 가전까지 새로 채워야 하는 집으로 와서 처음에는 모든 것에 선택지가 너무 많아 당황했다. 책상 하나만 해도 5-6만 원대부터 수백만 원까지 가격대가 다양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결혼(혹은 결혼이 아니어도 짜잔! 하고 온 집을 새로 꾸미는 어느 때) 전까지만 쓸 것들이라고 생각하면 적당히 가성비를 따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지금을 미래 어느 때를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냥 지금은 지금이라고 생각하고 나면, 나 혼자 신혼집을 차리듯 예쁘고 좋은 것들로 채우고 싶었다. 결과적으론 대단히 고급스러운 물건들을 들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성비를 제1기준으로 삼지는 않았다. 내 취향, 좋아하는 소재, 원하는 디자인을 고려해 질 좋은 가구들을 샀다.


어떤 행복은 나중으로 미뤄두다 보면 스르르 잊히고, 그렇게 잊히다 영영 사라지곤 한다. 그러니 나중이 아니라 지금 하고 싶은 건 하면서 살아가는 게 답이다. 수박 생각을 하다 생각이 왜 거기까지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수박 작전의 구세주는 근처에 사는 친구였다. 마찬가지로 혼자 살고 있는 친구도 자기 돈을 주고 수박을 사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9kg짜리 수박을 번갈아 안아 들고 집에 왔다. 크고 무거운 수박을 자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수박을 반듯한 네모 모양으로 착착 잘라 통에 담는 영상을 보고 따라 했는데 어째 네모 수박은 단 하나도 없었고, 테이블 밖으로는 수박에서 나온 물이 뚝뚝 떨어졌다. 큰 비닐 한가득 수박 껍질이 담겼다. 집의 모든 밀폐용기를 동원해서 수박을 담았다.


수박과의 오랜 사투를 마치고 예쁜 그릇에 담아 기분 좋은 탄산이 터지는 샴페인과 함께 먹었다. 유예하고 싶지 않은, 분명한 지금의 행복이었다. 다시 도전한다면 좀 더 깔끔하게 자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큰 밀폐용기를 몇 개 더 사야겠다.


수박 안고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에 멈춰서 본 여름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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