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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Mar 12. 2023

에너지 절약 모드

 안에 생겨나는 마음들에 집중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뭐든 선명했으면 싶다. 기쁨도 미움도 기대도 실망도. 미뤄뒀던 집안일을 하고 일기를 쓰고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정리하고 오래 샤워한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곳저곳에 부스러기로 있던 생각들이 뭉치고 뭉쳐 떠오르고, 때론 정리된 문장이 된다.


 반대일 때도 있다. 이번 주가 그랬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은  주였다. 초점이 나간 화면처럼 뭐든 흐리게 보며 지냈다. 해야  일은 많고 제대로 되는  없는  같은 날들에 유독 지쳐 보냈다. 비슷하게  풀리는 상황에서도 마음을 날카롭게 벼리고 싶을 때가 분명 있었던  같은데, 이번 주엔 무엇에도 깊게 빠지고 싶지 않았다.


어엿한 사회인이  덕분인지 관계 유지를 위한 대강의 감정은  에너지 없이 내보일  있었다. 하지만 진심을 다하는  다른 문제다. 진심에는 집중이 필요하고, 집중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진심으로 위로하고 웃고 축하하고 감탄하고 칭찬하고 고마워하지 못하며 보냈다. 사람을 만나고, 밀도 높은 대화 안에서 피어나는 스파크 같은 것에 즐거워하기보다는, 그저 혼자 소파에 흐물흐물 누워 어떤 것에도 과몰입하지 않으며 보냈다.


 태도는 여가 시간을 보내는 데도 적용되었다. 여러 취미 생활  가장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독서다. 스멀스멀 커지는 딴생각들을 차단하는 동시에   문장이 만들어내는 미지의 세계를 지어내야 한다. 어렵다.  작업 완전히 실패해서 일주일 동안  자도 읽지 않았다.


대신 이번 주엔 많은 시간을 유튜브나 예능을 보며 보냈다. 가장 적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즉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셀럽의 패션 하울을 구경하고, 지속 가능한 다이어트 레시피 같은  봤다. 안 봐도 그만인 것들. 보고 있으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들. 재미와 감동이 대강 9:1 비율로 담겨 있는 예능 토크쇼 봤다. 패널들은 잠시 눈물을 짓는 듯하다 이내 진지했던 분위기를 반성이라도 하듯 실없는 말들을 쏟아 낸다. 농담 따먹기 사이에 담긴 10% 진심,   정도의 깊이만큼 모든 것에 얕게 빠져 지냈다.


깊은 생각 깊은 사람 깊은 마음이 미덕인 세상이지만, 가끔은 그냥 모든 것에 얕게 발을 담그고 얕은 하루를 보내다 클라이맥스 없는 잔잔한 노래와 함께 스르르 잠에 들고 싶다. 아무것도 똑바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무딘 사람이 되면 어쩌지 잠시 서글퍼지다가도,  서글픔 역시 얕게 가져가고 마는 에너지 절약 모드의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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