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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Mar 06. 2023

우리끼리만 아는 탁월함

친구들과 밴드 비슷한 걸 만들었다던 브런치 첫 글​​을 기억하시는지?


놀랍게도 이 얼렁뚱땅 밴드는 여전히 순항 중이다. 각자의 삶에 대충 5-6순위 정도의 위치를 차지한 채 제법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2020년 가을에 처음 시작했으니, 햇수로는 4년 차 밴드가 된 셈이다. 더 이상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같은 핑계 뒤에 허술한 손놀림을 숨길 수 없다. 그래도 처음에는 합주실이라는 무서운 공간에 방문해 다른 음악인(?)들을 만나는 것조차 어색했다면, 이제는 합주를 위한 모든 과정들에 제법 익숙해졌다. 우리만의 루틴 같은 것도 생겼다.


우선은 선곡을 한다. 대체로 곡 후보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귀로 듣고 카피하는 능력 같은 건 아직 아무에게도 없다. 그러니 악보바다에 악보가 있어야 한다. 악기 연주가 어렵지 않아야 한다. 너무 많은 악기가 필요해도 안 된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노래는 별로 없다. 합의를 하기도 하고, 하고 싶었던 노래가 있는 사람이 밀어붙이기도 한다. 강한 음악적 욕심이 있는 사람은 없어서 대체로 평화롭게 결정된다.


곡이 정해지면 합주 전까지는 개인 연습 시간이다. 악보를 사고 각자 집에서 연습을 한다. 보통의 밴드라면 이 개인 연습이 가장 중요할 테지만, 사실 우리는 많이 하지 않는다. 악보만 숙지해 와도 다행이다. 그러다 서로 날짜를 맞춰 합주를 시작한다. 대부분의 연습은 이때 이루어진다. 초보가 왕초보를 가르치는 세상이라고 했던가? 우리의 합주가 정확히 그런 모양으로 돌아간다. 1할의 훈수와 9할의 응원을 던지는 시간. 그래도 요새는 한 곡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처음 합주를 시작했을 때의 연습 목표가 도입부 몇 마디였다면, 이제는 첫 연습 때 1절까지 얼추 굴러간다.


곡당 3-5차례의 합주를 하고 나면 이 작은 여정의 마무리는 녹음, 이라고 부르는 무언가이다. 어느 정도 음악이라도 부를 만한 소리가 나오면, 휴대폰으로 녹음을 하고 영상을 찍는다. 보통 이때쯤 되면 연습하던 곡이 좀 질리고 또 다른 노래가 하고 싶다. 그리고 더 해봤자 대단히 발전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나약한 마음이 든다. 음악이 완성되어야 하는 시간은 명확하다. 녹음하기로 한 날 합주실 예약이 끝나는 시간까지.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하는 장인정신도, 뺨을 후려치는 <위플래시>의 플레쳐 선생님도 없다. 합주실은 보통 2시간 예약하기 때문에 그 안에 끝내고 나와야 한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 그럼에도 틀리지 말아야 한다는 나름의 진지함, 끝나고 뭘 먹을까 하는 고민 같은 게 적절히 섞인 녹음(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말하는 것이 자꾸만 민망하다) 시간이 끝나고 나면 그렇게 한 곡을 졸업하는 시스템이다.


집에서 혼자 연습을 잘 안 하게 되는 데에는 그럴듯한 핑계가 있다. 혼자서는 여전히 볼품없는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방구석에서 계속해서 그런 소리를 내다보면 별로 재미가 없다. 그런데 합주실에선 내 초라한 소리 위에 다른 소리들이 함께 얹힌다. 그렇게 소리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하모니 비슷한 게 생기는 것도 같고, 얼핏 들으면 꽤 괜찮은 소리가 난다. 그러니까 우리의 합주는 거의 모든 순간 서로의 소리에 빚지는 셈이다. 특히 상습적 채무자인 나는 자주 다른 악기들 틈에 내 실수를 숨긴다. 그것이 바로 밴드의 매력 아닙니까?


일이나 사람으로 잔뜩 지친 하루를 보내다가도 합주하러 가는 길은 평소와 걸음걸이부터 다르다. 안 보던 하늘도 한번 보고, 갑자기 나무 사진도 찍는다. 합주실에 가까워지는 동안 서서히 여러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매일 듣는 노래도 달리 들린다. 화려한 기타의 리프나 베이스의 멋진 저음 같은 게 유난히 귀에 꽂힌다. 악기 하나하나를 음미하게 된다. 쉬는 시간 없이 두 시간 내리 합주를 해도 다른 어떤 곳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빠르고 밀도 있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면 종종 밴드 차세대의 '아들’이라는 노래 속 이 가사가 떠오른다.


더딘 것은 괜찮아
어떤 시기엔 아빠는 친구들과
우리끼리만 아는 탁월함으로 한 해를 보냈단다

우리끼리만 아는 탁월함으로 보내는 계절들이 서교동 어느 구석에서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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