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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Sep 03. 2023

가을에 만난 여름의 온도

*2021년 가을에 쓴 글을 다듬어 발행한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더는 브런치에 저장된 글이 없다. 매주 새로운 글을 써내야만 한다. 올해 가을은 촬영 촬영 촬영뿐!


지난주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울릉도를 갈 작정으로 경량패딩까지 챙겨 미리 강릉으로 향했건만, 출항 전날 파도가 세서 배가 뜨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잠시 고민하다 급하게 제주행을 결정했다. 경량패딩이 무색한 따뜻한 남쪽 섬 제주였다.


찰나의 무지개를 목격한 함덕 해변도, 일어나자마자 숙소 발코니에 앉아 본 짙푸른 수평선도, 바닷바람을 맞으며 읽은 책도 다 좋았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애초에 계획이 의미 없어진 여행답게 제주도에서도 별 계획 없이 돌아다녔는데, 애월에 들른다고 하니 엄마가 가고 싶어서 저장해 뒀다는 카페를 추천해 줬다. 들르기엔 동선이 애매해 그냥 해변 근처의 유명 도넛집을 가기로 했지만 그 유명세에 맞게 조기 마감한 상태였고 그렇게 원래 추천받은 카페 36.5도 여름 남쪽점에 가기로 했다. 작은 우연과 작은 사정들이 매일의 길을 안내했다.


이름이 무척이나 낯익어 인스타를 찾아보니 홍대에서 아지트처럼 드나드는 36.5도 여름 동쪽점과 관련이 있는 곳인 듯했다. 주문을 하는 김에 쑥스럽게 알은체를 하며 물었다. 역시 같은 사장님이 차린 공간이었다.


프랜차이즈라는 표현은 두 공간을 연결하는 말로 적절하지 않았다. 그저 동쪽점과 마찬가지로 남쪽점도 구석구석 신경 쓴 티가 났다. 저만의 사연과 역사가 있어 보이는 가구와 소품들. 터줏대감 같은 고양이. 그리고 무엇보다 동쪽점에서도 맡을 수 있던 이국적인 향 냄새. 화장실에서 향 냄새를 맡으니 두 곳이 이어진 듯, 동쪽점에서 켜켜이 쌓인 추억이 함께 전해져 왔다.


홍대 동쪽점에서의 루틴은 늘 비슷했다. 인심 좋게 따라주는 잔 와인을 시켜 마시고, 또 한 잔 더 시켜 마시고, 마시고, 이럴 거면 그냥 병으로 시키는 게 나았겠다 후회하고, 테이블 위에 불쑥 올라온 고양이랑 놀다가, 가파른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제주 남쪽점에서는 와인 대신 귤을 얹은 크로플과, 따뜻한 브라우니를 먹었다. 늘어지게 낮잠 자는 뚱뚱한 고양이를 구경했다. 처음 온 공간이었지만 어느 것도 낯설지 않았다.


좋은 공간에서 잠시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날 여행은 그런대로 이미 의미를 찾은 느낌이 든다.  그러고 나면 나머지의 시간은 다 덤 같다. 더 좋은 일이 생기면 좋고 아니어도 오늘 하루는 이걸로 됐다 싶은 마음.


작은 우연들에 호들갑을 떨며 감탄하고, 마음의 조각을 조금 남겨 두고 다시 길을 나서는, 그런 여행이 그리운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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