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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Mar 27. 2023

근데 그럼 모험은 언제 떠나지?

직장인의 휴가 아니고 모험

해적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도덕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당시 <원피스>를 감명 깊게 봤을 뿐이다. 하늘을 향해 깃발을 펼치고 끝도 없는 바다를 항해하는 루피의 모습은 당시의 내게 무척 자유롭고 낭만적이라 느껴졌다. 낯선 사람을 동료로 받아들이고 매일 새로운 공기를 마시며 떠다니는 삶을 꿈꿨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스트 바둑왕>을 보고는 금방 바둑왕으로 꿈이 바뀌었던가? 그럼에도 모험에 대한 동경은 여전했다.


대학생이 되고서는 본격적으로 역마살이 낀 듯 떠돌아다녔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되고 돈이 생기면 망설일 것 없이 비행기표를 끊었다. 방학이나 개교기념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젊은이의 덕목이라 여기며 열심히 보고 듣고 놀았다. 세상은 넓었고 넓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한국인들의 여행 정보가 없는 낯선 곳이면 오히려 좋았다. 하도 걸어 다녀서 족저근막염을 얻었고, 이상한 음식을 먹는 것은 재미있었다. 혼자가 되는 게 두렵지 않았고, 쉽게 새로운 친구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회사원이 되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프로젝트 하나에 속해 사실상 휴가 없이 일하고 나면 대휴를 모아 1달 정도의 긴 휴가를 갈 수 있었다. 장기 휴가를 떠날 수 있다니, 나에게 딱 맞는 업무 패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이 끝나갈 무렵 휴가를 계획할 시기가 되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수혈하듯 여행지를 정했다. 그럴 때 정해진 도시들은 대학생 때 내가 다니던 여행지들과 결이 조금 달랐다. 사이판, 코타키나발루, 치앙마이, 제주도 같은 대체로 휴양지였고 가끔 휴양지가 아닌 도시를 택하더라도 친척들이 있거나 재워줄 친구가 있는 캘리포니아, 상하이 같은 곳이었다. 물론 그렇게 다녀온 도시들 모두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순간들을 선물해 줬다. 그걸 부정하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예전과 무언가 달라졌고, 그 차이에서 조금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 드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여행 난이도가 높다고 느껴지는 인도나 몽골, 멕시코, 이집트 같은 곳은, 여전히 가고 싶으면서도 당장 다음 휴가에 갈 순 없지, 상태가 된다. 여전히 그런 여행은 매력적인 모험처럼 느껴지지만, 당장 지친 내가 다음 주에 떠날 수 있는 여행지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계속해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유예된다. 익숙하거나 편한 선택만을 하게 된다. 나 몽골 사막에서 별 보면서 보드카도 마셔야 되고, 옛날 양반들처럼 중국 역사 여행도 가봐야 되고, 뉴질랜드 해안선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자동차 여행도 가야 하는데, 대체 언제 시간을 내고 에너지를 모아 그런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고 새삼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회사원이 되면 모험 떠날 시간도 에너지도 없다고는 안 알려줬잖아요?


안 가본 길에 설레던 나는 어떻게 지금을 견디고 있을까?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휴가 때는 반드시 끝내주는 모험을 떠나리라 결의를 다져본다. 해적을 꿈꾸던 그때의 내가 분명 응원해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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