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련 Apr 02. 2023

부엌 천장에서 물이 샌다

연약한 우주에서 느끼는 공생의 감각

지난밤 꿈을 꿨다. 거실 벽을 타고 갑자기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벽지가 천장에서부터 빠르게 젖어들어가던 장면이 공포스럽게 남았다. 이내 아파트 붕괴 위험이 있다며 사람들이 빠르게 건물 밖으로 나갔다. 나는 나가기 전에 짐을 싸야 해서 다급한 마음으로 집 안을 동분서주했다. 뭔가를 꼭 찾아야 했으나 찾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급하게 가기 위해 짐을 싸는데 찾는 것은 안 보이고 계속 마음만 급해 패닉에 빠지는, 이건 내 오래된 악몽의 레퍼토리다. 그런 꿈은 이제 익숙하다. 그러나 어제 꿈의 별난 점은 벽을 타고 물이 떨어지고, 내가 살던 공간이 붕괴 위기에 놓였다는 것이다.


이런 꿈을 꾼 이유는 명백하다. 정말로 몇 주째 우리 집 부엌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기 때문이다! 바닥에 놓아둔 김치통(우리 집에서 휴지통 다음으로 큰 통) 안으로 밤새 물이 떨어졌고, 똑똑 맑은 물소리가 침대에 누워서도 새벽의 고요를 타고 귀에 꽂혔다. 자는 내내 들려오던 물소리에 꿈 특유의 과장된 상상력이 더해지니 그런 꿈이 탄생한 것이다.


취향과 애정을 듬뿍 담아 가꾼 나만의 우주는,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 그 순간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 공간에게 받던 환대의 감각은 사라졌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물이 또 얼마나 떨어졌는지 그것부터 살펴본다. 사방이 막혀있어야 한다는, 집의 기본 같은 조건마저 잃었다. 천장에 주먹만 한 구멍이 생겼다. 형광등을 통해 물이 떨어지니 수리 업체에서 아예 형광등을 떼어버린 것이다. 까맣게 빈 구멍을 요리조리 들여다보며 온갖 끔찍한 상상들을 했다. 정확히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를 그 구멍으로 벌레나 쥐, 그밖에 나쁜 무언가가 집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문을 활짝 열고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물이 떨어지는 이유는 몇 주째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아침부터 초인종을 누르는 방문자가 생겼고, 위층에 거주하는 부부와는 거의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자를 주고받고 있다. 시간 약속을 잡아 몇 가지 가설들을 실험하기도 했다. (ex. "10분간 싱크대 물을 틀어둘 테니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의문의 재난을 만나 새삼스럽게 공생의 감각을 느끼고 있다. 위층은 바닥을 뜯었다고 하고, 우리 집은 천장에 구멍이 생겼다. 우리 집 천장은 위층 집 바닥이고, 그 집 어딘가에서 물이 새면 우리 집에 물이 떨어진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당연하던 명제이지만, 아파트의 다양한 장치들이 그 사실을 잊을 수 있게 도와왔다. 그다지 믿음직하지 않은 구조물을 사이에 두고 우리가 많은 것을 공유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천장에서는 여전히 규칙적으로 물이 떨어지고 있다. 나만의 우주, 나만의 평화는 당분간 요원해 보인다.

작가의 이전글 근데 그럼 모험은 언제 떠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