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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Jul 09. 2023

여행을 떠나기까지

두고 오는 것들이 전보다 오래 밟힌다

일과 일 사이 작은 틈이 생겨 여행을 가기로 했다. 결심은 늘 그렇듯 짧았다. 월요일에 마음을 먹고 바로 휴가를 썼고 당장 그 주 일요일 비행기를 끊었다. 장소는 일본 삿포로. 목적은 피서. 모르긴 몰라도 북쪽이니까 서울보다는 시원하겠지. 날씨 어플 속 삿포로의 현재 기온이 서울과 별 차이가 없다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꼭 가야 하는 곳도, 꼭 먹어야 하는 것도 없다. 몸이든 마음이든 지금보다 조금 더 시원할 수 있다면 그걸로 의미를 다하는 여행이 될 예정이다.


그러나 빠른 결심과 다르게 여행 전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시간은 날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한 달씩 집을 비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는데, 이제는 딱 5일 집을 비우는데 신경 쓰이는 것들이 늘었다. 두고 오는 것들, 두고 와야만 하는 것들. 이것들을 말끔히 해결하지 않으면 여행 내내 걱정 고민을 등 뒤에 질질 끌고 다닐지 모른다. 그러니까 대체 뭘 두고 오길래? 자문해 보면 대단한 것도 없는데 말이다.


우선 집 안의 식물들. 우리 집 로즈마리는 3일에 한 번 물을 주는 걸로 나랑 약속이 되어 있는데, 5일이나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가? 안 그래도 예민한데 토라져 죽어버리면 어쩌나? 고사리가 여름을 맞아 신나게 자라고 있는데 물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두루두루 듬뿍 물을 주고 바람도 햇빛도 쏘여주며 아부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여름이면 한 두 마리씩 부엌을 날아다니는 날파리들. 어디 숨어있다가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이것들이 주인 행세를 할까 봐 걱정이 됐다. 쓰레기들을 싹 다 모아 버리고 싱크대 하수구도 말끔히 치웠다. 하는 김에 욕실 청소도 했다. 이제 네놈들이 우리 집에서 얻어갈 건 없다.


내가 휴가인 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올 업무 연락들. 메신저 프로필을 여행 모드로 바꿨다. 휴가 날짜와 함께 비행기 아이콘을 띄워뒀다. 제가 전화를 막 안 받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요, 지금 휴가거든요. 휴가를 잘 마치고 돌아온 후 내가 하게 될 회사의 일들에 대한 걱정과 기대가 뜬금없는 모퉁이에서 튀어나온다.


그러다 휴가 때 에어컨 끄고 가는 걸 잊어 전기요금 백칠십만 원이 나왔다던 인터넷 세상 속 누군가의 글이 불현듯 척 발목을 잡는다. 베란다 창문도 꽉 잠그고, 전열기구들도 빼고, 에어컨도 공기청정기도 잘 껐고, 전기레인지가 잘 꺼졌는지 냉장고 문이 잘 닫혔는지는 열 번쯤 확인했다. 덜 잠긴 수도꼭지는 없는지 굳이 눌러보고, 세탁기 문도 열어 두고, 잠자기 버튼만 누르던 컴퓨터의 전원도 완전히 껐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도, 창문을 완전히 닫아 더운 기운이 올라오는 집을 화려한 휴가용 원피스를 입은 채로 몇 번을 둘러봤다. 땀이 흘렀다. 미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겠지? 5일 동안 집은 잘 있겠지? 뭔가 빼먹은 건 없겠지? 발이 잘 안 떨어진다. 괜찮은 걸 알면서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걸 느끼며. 마지막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와 도어록이 완전히 잠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요란한 캐리어 바퀴 소리를 내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집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하나하나 체크리스트를 지웠다.


매일의 삶을 꾸려나가는 공간을 떠나기까지의 무게가 전보다 아주 조금씩은 무거워지고 있다. 여행을 결심하기까지의 가벼움이 그 무거움을 상쇄시키고 있지만, 언젠가는 신경 쓰이는 것들이 더 많아져 여행이 전처럼 신나기만 한 일이 아니게 되려나?


그럼에도 아직은 여행이 좋은 이유. 비가 오는 정류장에서 공항버스를 기다리며 여행에 잘 어울리는 음악을 골라 들었다. 귀에 꽂히는 둥둥 소리와 함께 빠르게 여행자의 기분이 되었다. 내 뒤를 따라오려던 걱정도 고민도 별 게 다 적힌 체크리스트도 실시간으로 희미해졌다.


가벼운 여행을 하고 가볍게 돌아와야지. 두고 온 것들은 다 그 자리에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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