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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Jul 16. 2023

조금도 냉정하지 않은 승부의 세계

살아남기 말고 살아가기

최근 몇 달 서바이벌 예능에 푹 빠져 지냈다. 우연히 한 작품을 재밌게 본 후 갑자기 비슷한 포맷의 다른 프로그램을 찾아보게 되었다. 예전에 봤던 작품을 다시 보기도 했다. 탄탄한 세계관에 화려한 세트, 진심으로 임하는 출연자들의 조합은 언제든 과몰입할 준비가 된 시청자인 나에게 딱이었다. <피의 게임>, <피지컬 100>, <사이렌>, <더 타임 호텔>, <더 지니어스>, <보물찾기> 등의 국내 예능부터 <더 몰> 같은 해외 예능, 그리고 <넥스트 인 패션>이나 <인테리어 디자인 마스터> 등 조금 다른 장르의 직업 서바이벌까지 가리지 않고 봤다.


프로그램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의리나 우정 같은 건 프로그램의 취지에 맞지 않는 감정이었다. 배신과 술수, 모욕과 다툼이 그 빈 자리를 채운다. 목표는 오직 하나, 경쟁을 통해 최후의 1인이 되는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다가 쉽게 만질 수 없는 큰돈이 걸려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감정의 민낯을 보였다. 이간질을 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모든 걸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묘한 길티 플레저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괴롭고 슬프기도 했다. 아, 역시 이게 인생인가.


나에게는 만나기만 하면 보드게임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갑자기 서바이벌 얘기를 하다가 왜 친구들 이야기인가 하면, 생존 예능 속 참가자만큼이나 우리도 제법 승부에 진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 승부는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게임의 종목은 조금씩 바뀌지만, 만나면 일단 테이블에 둘러앉고 보는 건 우리 사이의 불문율이 되었다. 압도적인 강자도 압도적인 약자도 없지만, 모두 나름의 승부욕을 가지고 그 시간을 꽉 채운다. 다 큰 어른들이 새벽까지 졸린 눈을 비벼가며 몇 시간씩 게임을 하고 있다 보면 대체 뭐 때문에?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냥 재미있으니까, 로 이유는 끝난다.


우리의 경우 그런 민낯을 보일 이유는 없다. 목적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친구들과 게임을 하다 보면 생존 예능을 볼 때와는 정 반대의 감각을 느낀다. 이게 인생이었음 좋겠다.


이번 주말 오랜만에 친구들과 1박 2일 보드게임 파티를 벌였다. 카드의 특정 조건이 충족될 때 테이블 위에 선착순으로 손을 차곡차곡 올려 쌓아야 하는 게임을 했고, 역시나 꽤나 진심이었다. 지금 보니 손등에 수상한 작은 상처가 생겼을 정도이다. 단 한 명이라도, 살아가는 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이 게임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면 깨져버릴 몰입이지만 누구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대단한 걸 걸지도 않는다. 보통 설거지 당번이나 숙소 침대 선택권 같은 걸 건다. 하다못해 커피 쏘기 같은 것도 잘 안 하는 이 사행성 제로의 승부는 최후의 상벌 시간이 되면 더욱 싱거워진다. 꼴찌에게 설거지를 시키기로 해놓고 그냥 먼저 싱크대 앞에 선 사람이 설거지를 하고, 꼴찌가 불편한 침대에서 자야 하는데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 그냥 다른 사람이 불편한 침대에서 잔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최선을 다한 건데?


이런 물렁함은 게임 도중에도 종종 드러난다. 규칙 잘 몰랐으니까 봐달라고 떼쓰면 봐주고, 그냥 혼자만 알고 넘어가도 될 걸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기도 한다. 때론 우리끼리 판정이 불가능해서 외부의 권위(ex. 표준국어대사전)에 판정을 의탁하기도 하지만, 그 국어사전의 권위 위에 우리의 융통성이 있다. 언제나 규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이 치열한 게임의 목표는 서바이벌, 즉 최후의 1인으로 살아남기가 아니다. 내가 승부를 볼 차례가 오면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몰입하고 이기고 싶어 하다가도, 배달 음식이 도착했다는 벨이 울리면 자연스럽게 경기는 멈추고 다들 비닐을 뜯고 수저를 세팅한다.


치열한 승부라는 건 우리가 만드는 우정의 일상 속 작은 이벤트에 가깝다. 애초에 뭘 하는지는 어쩌면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절인연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오랜 시절을 함께 해버린 친구들과 점점 삶의 많은 부분이 달라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곳을 보며 함께 살아가고 무언가를 같이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유일한 목표일 뿐이다.


'살아남다(survive)'라는 단어의 이미지를 내 맘대로 상상한다. 살아남은 사람. 외롭고 황량한 곳에 홀로 남은 한 사람이 떠오른다. 눈빛은 달라져있고 얼굴에는 한때 동료였던 이들의 피가 튀어있다. '살아가다(live)'라는 단어를 상상한다. 살아가는 사람들. 대단한 굴곡 같은 건 없는 이들이 꾸역꾸역 함께 앞으로 걸어간다. 그리하여 우리의 승부의 세계는 늘 냉정과 거리가 멀다. 혼자 살아남기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가 목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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