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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Nov 05. 2023

각자의 사정

시월 말의 문경은 무척 쌀쌀했다. 새벽까지 야외 촬영을 하다 보면 두툼한 패딩 안에 껴입은 옷들 사이로도 칼바람이 파고들었다. 무릎과 얼굴은 금세 시렸고 나도 모르게 잔뜩 몸을 웅크리느라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가면 어깨와 등이 뻐근했다.


그렇게 긴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만성 수면부족으로 차에만 타면 잠이 들었기 때문에 한겨울 같던 촬영장에서 마지막 오케이 사인을 듣고 차에 타 눈을 감았다가 뜨니 우리 집 우리 동네였다.


우리 동네는 어디 벌써 추운 지역이 있냐는 듯 시치미를 떼는 따뜻한 가을 날씨였다. 현장에서부터 내내 뜨끈한 국물이 당겼던 지라 집에 들어가기 전 단지 상가의 편의점에 들렀다. 촬영장에서의 추위에 대비해 껴입은 히트텍과 목폴라와 롱패딩으로 몸이 둔했다.


동네 편의점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제법 사람이 많았는데, 하나같이 얇은 잠바 차림이었다. 그제야 잔뜩 옷을 껴입고 둔하게 걷는 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간 낯선 나라에 온 이방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밤까지 야외에서 일하다 보니 현장은 겨울이 빨리 오고 또 늦게 끝난다. 내 촬영장에 있다가 짬을 내어 외국에서 오랜만에 온 친구를 만나러 번화가에 간 참이었다.


4월에도 내 옷차림은 여전히 롱패딩이었고, 그게 이상하다는 것도 못 느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거리의 모든 사람들의 옷차림이 봄이었다. 하늘거리는 꽃무늬 원피스, 얇은 재킷들을 보고 잠시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혼자만 봄을 맞이하는 것도 잊고 살았던 것이다. 그 거리의 누군가에겐 살랑이는 봄 날씨에 김말이 같은 패딩을 입고 번화가에 나온 내가 이상해 보였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길을 걷다 마주하는 이상한 사람, 화난 사람, 슬픈 사람도 다 저마다의 전사(前史)를 지닌 채 그 자리에 이상하게, 화나게, 슬프게 있는 것일 테다. 수상하게 두꺼운 옷을 껴입은 사람도. 이 사람이 어디에서 어떤 하루를 보내다 온 것일지 모른다. 내가 느낀 이질감과 외로움만큼 타인들에게 좀 더 넉넉한 마음을 가져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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