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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Nov 13. 2023

낡아버린 것들

촬영 현장은 이제 책대본보다 아이패드가 대세이다. 일일이 여러 권의 대본을 들고 다닐 필요 없고, 언제든 원하는 씬 원하는 대사를 검색으로 찾을 수 있으니 무척 편하다. 나 역시도 6년 전 미국 여행 블랙 프라이데이 시즌에 산 구식 아이패드를 그동안 전국 방방곡곡 열심히 들고 다녔다.


요새 내 아이패드를 보면 다들 한 마디씩 한다. 케이스도 없이 그렇게 달랑 들고 다니는 게 불안하지 않냐는 것, 그리고 어쩐지 패드가 조금 휘었다는 것. 하도 떨어트리고 잃어버리고 밟히고(?) 하다 보니 그냥 그렇게 강한 아이가 되었다. 오늘은 부슬부슬 비가 왔는데 정신이 없어서 그러려니 하며 비를 맞히고 다녔다.


처음 아이패드를 살 때만 해도, 현장은 책대본이 대세였던 터라 얼리어답터가 된 기분으로 애지중지했던 것 같다. 아마도 내 돈으로 산 최초의 고가 제품이라 한 번이라도 떨어트리면 벌벌 떨었다. 다양한 기능을 적극적으로 탐험하고 활용했고, 세상 불편하게 아이패드로 장소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자랑하고 싶었던가. 전자기기에 이름을 붙여주는 섬세함 같은 건 없어도 이 편하고 예쁜 제품을 동네방네 들고 다녔더랬다.


요새 이렇게 막 다루는 이유는 만으로 6년을 썼으니 이만하면 잘 썼다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고, 결정적으로 언제 갑자기 망가질지 몰라서 이미 이걸 대체할 중고 아이패드를 지인에게 구매해 뒀기 때문이다.


한때 애호받던, 지금은 낡아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것이 되는 순간 조금씩 낡은 것이 되어가는 것들. 이미 그것을 대체할 더 좋은 것이 준비되어 있는 것들.


어느 순간 갑자기 더 이상 켜지지 않는 모니터를 마주하게 되면 나는 잠시 쓸쓸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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