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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Nov 27. 2023

10%의 가능성을 택한 밤

<블루 자이언트>(2023)를 보고 이상한 캐릭터에 꽂혔다

*영화 <블루 자이언트> 스포일러가 조금 있긴 한데, 이 정도는 즐거운 관람에 큰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블루 자이언트>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보고 나면 열정이 생기고 열심히 살고 싶어 진다는 선배의 추천에 혹했다. 주 7일 일하는 와중에 애써 무리해서 영화를 예매했다. 열정? 돈으로 사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블루 자이언트>는 세계 최고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를 꿈꾸며 상경한 고등학생 다이가 재즈 밴드를 결성하며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전형적인 소년 만화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다이가 색소폰을 연주한 지는 고작 3년, 그러나 그는 천재, 게다가 참내 연습벌레이기까지, 하필 운도 좋아서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천재 피아니스트를 만나고, 잠시 신세를 지던 평범한 고교 동창이 드럼에 강한 열정을 보인다. 그렇게 모인 이 셋이 밴드 '재스'를 결성하고 도쿄의 재즈 공연장을 도장 깨기 하며 성장한다. 이들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걸 응원할 수밖에 없다. 작화가 많이 아쉬웠지만 영화관을 가득 채우는 재즈의 선율이 그 아쉬움을 상쇄해 준다.


주인공의 재즈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보며 나도 그 열정을 얻었나? 아니, 어쩐지 이상한 캐릭터에 꽂혔다.


그는 이름도 없는 단역이다. 특징적인 점이라고는 코가 빨간 회사원이라는 점. - 앞으로 그를 딸기코 회사원이라 부르겠다. - 딸기코 회사원은 우리의 주인공 다이의 열정과 실력을 보여주는 캐릭터로 쓰인다. 첫 공연이 잡히고 관객이 아무도 오지 않을 걸 걱정한 다이는 공연날 아침 번화가로 나가 지치지도 않고 자기가 만든 전단지를 돌린다. 딸기코 회사원은 지나가다 그 전단지를 받아 든다. 다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묻는다.


다이        오늘 저희 공연에 올 확률이 얼마나 되세요?

딸기코     (전단지를 받아 들고 당황하며) 네? 10프로 정도?

다이        저희는 100프로, 아니 120프로로 열심히 할테니까 꼭 오세요!!


(기억에 의존해 적은 대사이니 정확도는 대강 70프로임을 밝혀둔다.)


그리고 그날 밤, 딸기코 회사원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공연의 사실상 첫 손님으로 등장한다. 첫 공연 이후 밴드 '재스'는 점점 더 큰 무대에 서게 된다. 마침내 꿈꾸던 무대에 섰을 때도 딸기코 회사원은 어김없이 관객석에 등장해 박수를 친다. 그는 이름도 없는 단역이니 관객들이 그를 계속 기억하게 하려면 특징적인 설정이 필요했을 거고, 그래서 그의 코는 딸기코가 되었을 테다.


평소 같으면 당연히 주인공 다이에 감정이입하며 봤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딸기코 회사원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둘리가 아니라 고길동에게 공감이 되면 어른이라고 했던가? 나도 이제는 열정 빼면 시체인 천재 주인공 보다 지나가는 단역에 마음이 가는 어른이 된 걸까?


그의 코는 왜 빨간가? 매일 늦게까지 회식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침 출근길에 받은 조잡한 전단지를 쥐고 그날 밤 퇴근 후 낯선 재즈 공연장을 찾은 그의 하루가, 그 후로 '재스'의 팬이 되어 재즈 공연장을 찾아다닌 그의 나날이 궁금하다. 그는 더 이상 다이처럼 청춘의 무모한 열정을 가질 순 없지만, 다이처럼 자신의 하루를 온전히 좋아하는 것에만 쏟을 수도 없겠지만, 퇴근 후 그 열정을 응원하며 박수를 쳐줄 수 있다.


아마도 무척 피곤했을 그날 밤, 10프로의 가능성을 택해 마음을 다해 좋아할 새로운 대상을 발견한다. 어쩐지 내겐 청춘의 열정보다도 이름 모를 단역의 선택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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