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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Jun 04. 2023

2013년 여름 인천공항

인생의 순간들

주인공 캐릭터가 잘 잡히지 않았다. 장면들 안에서 제 기능을 못하는 건 아닌데, 어쩐지 살아있는 인물 같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함께 대본 회의를 하던 사람들과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다가 이 캐릭터 인생의 다섯 장면을 꼽아보자는 제안을 했다. 지금 이 인물의 삶에 영향을 끼친 다섯 순간들. 나중에 그 순간들이 실제로 쓰일지 쓰이지 않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만드는 우리만 알고 넘어가는 서사가 되어도 괜찮았다.


흐르던 물줄기가 방향을 틀었을 찰나들. 평행 우주가 있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전혀 다른 삶이 펼쳐졌을 거라고 짐작되는 순간들. 그렇게 다섯 장면을 만들어 나가다 보니, 이전보다 이 인물을 조금 잘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회의는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내 인생을 돌아본다면 그런 식으로 방향이 바뀐 순간은 언제일지 궁금해졌다. 지금 당장 답해야 한다면 어떤 순간들이 될까? 바로 좌르륵 다섯 장면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어렵지 않게 떠오른 큰 결심의 순간과 큰 슬픔의 순간을 지나 세 번째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2013년 8월의 인천공항이었다.


얼마 전까진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스웨덴의 도시로 떠나는 날이었다. 스물둘의 교환학생. 혼자 살아본 적 없음. 혼자 비행기 타본 적도 없음. 늦은 시간까지 짐을 싸느라 피곤했지만 동시에 대단한 모험길을 떠나는 듯 설렜다. 앞으로 6개월 어떤 시간이 펼쳐질지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는 건 무섭고 신나는 일이었다. 배웅하러 나와준 사람들과 다 같이 사진을 찍었다. 입국장으로 들어가는 길 마지막 인사를 하던 엄마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고, 당시 만나던 사람이 엄청 큰 편지를 건네줬다. 


그 밖에 공항까지 가는 길이나 그날의 상황들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 순간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때 그렇게 인천공항 출국장을 떠난 내가 이후 6개월간 만난 낯선 세계가 내 삶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꿈을 발견했다든가, 자아를 찾았다거나,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거나 하는 거창한 건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도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 그때의 기억들이 꽂아놓은지도 몰랐던 낙엽 책갈피처럼 툭 떨어진다. 야채를 볶다가, 자전거를 타다가, 전시를 보다가, 그냥 많이 걷다가 불현듯. 가끔 지금의 내가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면 그때 용감하게 낯선 거리를 누비던 나를 생각한다.


한 학기에 더해 2달의 여행을 했고 16개국을 돌아다녔다. 세상은 넓다, 사람은 다 다르다, 하는 삶의 당연한 명제들을 나는 그 6개월에 다 배웠다.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뭘 싫어하는 사람인지 조금 알게 되었다. 요리를 할 줄 알게 되었다. 신선한 야채들을 삶고 찌고 볶으며 건강한 식사에 관심이 생겼다. 돈 관리를 하고 살림을 꾸려나가는 법을 배웠다. 낯선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많이 걸었다. 걸어 다니는 게 재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혼자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하는 게 두렵지 않아 졌다. 내 세계가 넓어졌다. 상상의 폭도, 꿀 수 있는 꿈의 크기도 커졌다. 그 당시에도 오래 기억에 남을 순간들을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그립고 소중할 줄은 몰랐다.


그 6개월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언젠가 블로그를 하겠다며 찍어뒀던 수만 장의 사진들은 여전히 드라이브에서 잠자고 있다. 블로그는 안 했다. 아마 프롤로그만 썼던가. 찍어둔 사진들은 몇 년에 한 번도 잘 안 본다. 기억이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휘발되는 걸 느낄 때 슬프다. 더 늦기 전에 글로 잡아둬야지. 시간순으로 쓰려 다짐하면 늘 도입부만 만지다 끝난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아무 때나 가끔 기억에 남는 장면들을 꺼내보려 한다. 프롤로그 부자는 이렇게 또 하나의 프롤로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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