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현장은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13시간. 그 안에 오늘 하루 촬영 스케줄을 전부 소화해야 한다. 스케줄표를 보고 나면 왠지 승부욕이 생긴다. 빽빽이 적힌 이 씬들을 다 소화해고야 말겠다는 투지가 생긴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퀄리티의 결과물을 얻어가며 스케줄을 다 소화하자면 하루 종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고민과 결정의 연속인 잘게 쪼개진 시간을 보내고 집에 오면 완전히 흐물흐물 파김치가 된다. 그럼에도 오늘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걸 느끼면 기분이 좋다. 지금의 나에겐 다른 무엇을 할 때보다 촬영 현장에서 시간이 가장 빠르게 흐른다.
몇 년 전, 종종 '인생이 너무 긴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워라밸 좋은 업무를 하며 즐거울 때도 많았지만, 가진 시간은 많은데 그 시간을 이런저런 것들로 채워도 어쩐지 남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할 일을 다 끝내고도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그 시간이 영원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퇴근 이후의 시간들에 애써 재미있는 것들을 만들어봐도 왠지 공허했다.
회사를 옮긴 후 눈코뜰 새 없이 바빠지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금세 사라졌지만, 결국 큰 맥락으로는 비슷한 깨달음이 남았다. 결국 사는 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감각을 주는 것들을 부지런히 찾아내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채우는 거라는 걸. 함께 있으면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사람들을 만나, 시계를 볼 새도 없이 양질의 대화를 하고, 시간 '순삭'인 흥미로운 작품들을 보고, 꿈도 없는 단잠을 자고, 새로운 경험들을 하며 그렇게 채워나가다 보면 한때는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훌쩍 흘러있을 거라는 걸.
그걸 위해 다들 취미 생활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때론 불량 식품 같은 도파민을 찾아 헤매는 거겠지. 요즘의 나는 일을 하며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고 소중하다. 어쩐지 일 중독자 같은 발언이지만, 결국 몇 년 전의 나에겐 이게 제일 간단한 해결책이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