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시켜준 적 없지만 아무튼 추구미 변경
새로운 프로젝트의 포스터가 나왔다. 동료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고 나 또한 꽤나 마음에 든 이번 포스터는,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에서 출발했다. 몇 년 전, 휴가를 쪼개 찾은 사진전에서 인상 깊게 봤던 작품이었다. 그 사진이 이번 포스터의 가장 첫 레퍼런스가 되었다.
포스터 팀에 그 이미지를 포함 몇 가지 이미지들을 보내며 작업이 시작되었다. 내가 생각한 포스터는 이런 분위기라는 걸 전달했고, 이후 그게 발전되어서 최종 결과물이 나왔다. 우리 작품의 색이 입혀지고 여러 사람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들과 배우들의 호연이 더해져서, 처음 출발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포스터가 탄생했다. 그렇게 세상에 또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사진전을 보러 갈 때의 나는, 눈앞의 이미지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 쓰이게 될지 까맣게 모른 채 그저 아름답고 새로운 것을 봤다는 사실에 만족했었다.
한때 창의성이라는 건 번뜩이는 천재들이 신탁처럼 받아내는 무언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성실함이나 꾸준함 같은 가치는, 뭐랄까 너무 범생이 같아서 멋이 없다고 느꼈다.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잘 나온다? 당연하지!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데도 성적이 잘 나온다? 멋진데??? 그래서 내심 나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길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대부분의 창의성은 성실한 투입에서 나온다는 걸.
이 미묘한 화학 작용은 투입한 만큼 산출되는 식으로 정직하게 작동하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무수한 인풋들이 제멋대로 쌓인 채 어딘가에서 구르고 굴러 합쳐지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것이 나온다. 다양한 곳에서 수집된 것들이 의외의 지점에서 딱 맞을 때의 쾌감이 있다. 여기서 얻은 아이디어와 저기서 얻은 아이디어가 합쳐져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건 언제나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하여 이제는 가만히 앉아 뭔가 멋진 것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언제 어떻게 멋진 화학 작용이 이루어질지 모르니 기약 없이 성실히 모으고 겪고 본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제법 그럴듯하고 새로운 게 나오게 된다는 걸 여전히 매번 감탄하며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