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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Sep 12. 2021

내 인생의 금지어

단어에 대한 고찰: 굳이

 사회에 발을 디딘 누구나 흑역사  개쯤은 만들지 않나? 초년생의 나는 취미처럼 만들며 돌아다니는 편이었다. 따라잡으려야 따라잡을  없는 시간을 따라잡고 싶어서, 능숙해 보이고 싶어서, 무시당하기 싫어서, 이유는 다양했다. 당시 내가 생각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체로는 자충수) 역시 다양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굳이?'라는 말에 꽂혔었던 것이다.


아마 그때 같이 일했던 선배의 말버릇  하나였을 거다. 열심히 고민해서  의견이 그런 반응을 들었을 , 일단 기부터 죽었다. 그리곤 이내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 내가 쓸데없는 것까지 너무 신경 썼나 보다. 선배는  판을   아는 사람 같았다. 나는 지엽적인 것에 꽂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한마디로 프로페셔널함을 얻을  있어 보였다.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과 일할 때면 괜히  표현을 따라 쓰기 시작했다.


마법의 단어처럼 느껴졌다. 네가 얘기하는  나도  생각하고  고민해본 건데 그거 필요 없어,   마디로 정리할  있었다. 나의 통찰력이 어필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이상했다. 일을 하며 지켜본 놀라운 순간들은 대체로  '굳이'에서 시작됐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     고민하고,    들어보고,    생각할  나오는 디테일의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때론 사소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체에  사소함이 더해지는 순간 판도가 바뀌곤 했다.


어찌 보면 대부분의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다 그 '굳이'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누군가의 사연을 그렇게까지 오래 보고 들어야 하는 이유를 캐릭터로, 서사로, 스펙터클로 만들어가는 거다.


관계에도 적용될  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그렇게까지   사랑이, 우정이, 의리가, 그 밖의 모든 좋은 감정들이 피어난다. 그렇게 생각하그간 받아온 마음들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긴긴 주말을 보내며    다짐한다. 굳이 마음 쓰고, 굳이 고민하고, 굳이 바라보는 사람이고 싶다.  '굳이'들을 그러모아가며 조금  섬세한 마음을 갖고 싶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일에서도.


'굳이' 평생 금지어로 삼고    때마다 가상의 쟁반이 머리 위로 하고 떨어져 내려와도 살아가는데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싱거운 상상본다.


콘크리트 틈에서 피어난 별 모양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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