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처럼 소비하는 '야식'
밤이 문제였다. 낮 동안 눌러둔 감정들은 조용한 밤이 되면 기어이 고개를 들었다. 담당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느낀 무력감, 직장 동료와의 대화에서 느낀 사소한 서운함, 인기 드라마를 보지 않았으므로 대화에 낄 수 없었던 머쓱함과, 겉모습으로 성격을 판단하는 상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해 느낀 억울함 같은 감정은 밤이 되면 하나둘씩 울컥울컥 올라와 허공에 똬리를 틀었다. 형용할 수 없는 허전함은 한꺼번에 밀려들고 허해진 마음은 허기가 되어 돌아온다. 갑자기 출출해지는 느낌을 견디기 힘들다. 배달앱을 열고, 이미 여러 번 시킨 익숙한 메뉴를 훑는다.
배달앱이 생기기 이전에 야식을 먹는다는 건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일단 가게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지부터 따져야 했다. 냉장고 옆면에 붙어있는 배달 전단의 메뉴가 ‘중식’이나 ‘족발’ 뿐이라면 먼저 근처의 치킨집을 검색하고, 그중에 우리 집까지 배달이 되겠거니, 하는 곳을 찾아내야 했다. 무언가를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은 ‘이 밤에, 그렇게까지 먹어야 할 일인가?’를 고민하게 했고 그 고민은 이내 포기로 이어졌다. 고민을 뛰어넘어 야식을 먹어야만 하는 날이라면, 전화를 걸어 원하는 메뉴와 주소를 또박또박 말하는 관문을 거쳐야 했고, 다음에는 배달원을 마주하고, 음식을 건네받고,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주고받는 일을 거쳐야 했다. 현금결제가 아니라면 휴대용 카드리더기에 카드를 긁고 작은 영수증이 나올 때까지 뻘쭘하게 서 있는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야식’을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수고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이 야식이었다.
모든 수고는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대체되었다.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주문은 끝이 났다. 요청 사항에 ‘벨 누르지 마시고, 문 앞에 두고 문자 주세요’까지 입력한다면 완벽에 가까워진다. 목소리를 내지 않고도, 누군가와 대면하지 않고도 음식은 집 앞에 도착했다. 야식은 가장 빠르고 편리한 방법으로 나의 공허하고 무기력한 밤을 채웠다. 배달앱이 스마트폰 배경화면 한구석에 위치한 뒤로,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야식을 먹는 일로 바뀌었다.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은 도파민이 되어 한밤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 정도의 보상쯤은 괜찮다’고 시작한 야식 배달은 ‘진짜 오늘이 마지막이야’로 이어졌지만 지켜진 적은 없었다. 운동복을 챙겨입고 헬스장을 가는 일보다 야식을 주문하는 일이 훨씬 쉽고 간단했다. 스트레스를 핑계로 먹는 행위는 중독처럼 빠르게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아침마다 퉁퉁 부은 얼굴, 늘어난 뱃살을 마주한다. 나를 위한 보상이라 설득한 어젯밤의 내가 부끄러워진다. 편리함으로 갈망하는 보상은 아침에도 나에게 형용할 수 없는 허전함을 안긴다. 야식이 문젠지, 배달앱이 문젠지 알 수 없는 아침. 더부룩한 속으로 출근길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