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차가 되지 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by 메모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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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카페인에 취약하다. 카페인을 먹으면 심장이 빨리 뛰고 잠을 못잔다. 한마디로 카페인이 안받는 몸이다. 나와 카페를 갈 때는 주로 초코나 스무디류를 마시는데, 배가 불러 단 음료가 부담스러울 때는 '디카페인' 원두를 찾는다. 디카페인 원두가 없을 때 남편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은 물을 마시는 것이지만, 1인 1메뉴가 필수인 카페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마실거리를 찾느라 티(tea) 종류까지 훑어보지만, 차에는 흥미가 없는 남편으로서는 카페인이 없다는 캐모마일이나 루이보스도 영 마땅치가 않다. 남편은 메뉴판 앞에서 한참을 고심하다 이렇게 주문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원 샷으로 주세요."


희어멀건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남편은 '딱 좋다'는 표현을 쓴다. 얼음이 녹아 커피의 색이 점점 흐려질수록, 남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남편은 좀처럼 따뜻한 커피에는 적응을 못한다. 아무리 원샷이어도 따뜻한 커피는 '보리차' 같은 느낌이 안난다나. 하긴, 커피를 좀 마시는 나로서도 식어버린 커피에는 손이 잘 안가는데. 커피 안 먹는 남편은 오죽하겠나 싶기도 하다. 얼음이 거의 다 녹아 물방울이 잔뜩 맺힌 유리컵. 그 안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어쩐지 커피라기보다 '커피향'에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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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회사를 옮기고부터 차에는 커피가 남은 테이크아웃 잔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아있는 커피의 색으로 짐작해 보건데, 커피는 채 다 마시지 못하고 얼음이 녹아버려 반 이상을 채운 듯했다. '여기는 점심 먹으면 꼭 커피를 마시러 가네.' 며칠 전 남편이 저녁을 먹으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 말에 묻어 있던 곤란함이 차 홀더에 꽂혀있는 테이크아웃 잔에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아내인 나는 안다. 다같이 점심을 먹고 으레 카페로 향하는 코스에서 회사를 갓 옮긴 직원이 이탈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고, 남자만 있는 회사에서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외칠 때 '저는 요거트 스무디요'나 '아이스 초코요'를 외치는 건 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아 그럼 저는 원 샷으로 해주세요'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닐게 분명했고. 그래서 결국 '네 저도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의 결과물이 이 테이크 아웃잔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테이크 아웃잔을 꺼내 커피를 버리며 괜히 짠한 마음이 든다. 차에 있는 이 테이크 아웃잔에 커피 말고 스무디가 남아있는 날에는, 이 기분이 조금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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