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번거로운 맛

이달의 소비 : A.C 퍼치스 루이보스 바닐라

by 메모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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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시원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진다. 얼음을 꺼내고 커피 캡슐을 고르다 문득, 몇 시간 뒤 침대에서 뒤척일 내 모습이 떠오른다. 요즘 부쩍 카페인에 예민해진 탓이다. 커피를 포기하고 찬장을 열어 마실 거리를 찾는다. 언젠가 직장 동료에세 선물 받은 A.C. 퍼치스 티백 세트가 눈에 띈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 상자를 열어 허브차 하나를 꺼낸다. 찻잔에 담긴 티백은 오로라처럼 번지며 물을 갈색으로 물들인다. 오랜만에 소서도 꺼낸다. 티백을 건져둘 용도다.

무언가를 마시는 일에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집에서도 커피를 마셔보겠다고 핸드드립 용품과 에스프레소 머신을 샀지만, 커피 가루와 설거지에 질려 결국 캡슐 머신에 정착했다. 뒤처리가 깔끔한데에는 캡슐커피만 한 게 없었다. 설거지도 내가 마신 컵 하나만 닦으면 끝이었으니. 티백이 오랫동안 찬장에 머물렀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차를 마시려면 티백을 건져둘 소서나 차를 우려낼 저그가 필요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티백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도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찻잎이 아니라 티백이라 해도 나에게는 핸드드립 커피만큼 손이 가는 일이었다. 아주 단순하게 즐기기에는 여러모로 캡슐커피만 한 게 없었으므로, 줄곧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카페인 탓에 선택한 차선책이었지만 차는 기대 이상으로 상쾌하다. 커피에 익숙한 후각에 화사한 향이 스민다. 오래전 여름 휴가로 떠난 템플스테이가 떠오른다. 에어컨 없이 창을 열고 앉아 산바람을 맞으며 마신 차 한 잔. 스님은 물을 끓이고 다관을 예열하고, 적절한 온도가 될 때까지 물을 식힌 뒤, 차를 우려내서 찻잔에 천천히 차를 따랐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차를 마시는 행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맑게 한다'라는 말을 들었다. 한 모금씩 차를 넘길 때마다 마음은 고요해졌고, 정신은 천천히 깨어났다. 내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더 마신다. 곁의 소서에는 물기 머금은 티백이 놓여 있다. 차를 마시면서 겨우 소서 하나 꺼내는 일을 번거롭다고 여겼다니, 머쓱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다. 여행은 짐을 싸는 것부터 시작이라던 말처럼, 좋아한다고 여겼던 커피조차 나는 그저 '간편하게 소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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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처분한 커피용품들을 다시 들일 순 없고, 차는 조금 더 정석대로 즐겨볼까. 마음에 새로운 결심이 선다. 티백이 아닌 찻잎으로 즐기는 한밤의 티타임을 생각하면서, 에디션 덴마크 홈페이지에 접속해 찻잎 종류를 살핀다. 어떤 것이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다, 카페인이 없는 루이보스 바닐라를 고른다. 하늘색의 틴케이스는 여름의 색을 담은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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