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소비하는 산책
나는 대학교 새내기, 그 오빠는 2학년이었다. 그는 나에게 산책 가자는 말을 자주 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도, 축제 뒤풀이 때 다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도, 수업이 끝나 강의실 밖을 나갈 때도 늘 조용히 옆으로 와서 같이 산책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산책이라는 단어에는 얹히는 부담이 없었다. 밥을 먹으러 가자거나, 커피를 마시러 가자는 제안은 가볍지가 않았다. 아무리 학교 근처라 해도, 메뉴를 정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보내야만 하는 기본적인 시간이라는 것이 있고, 더군다나 한 푼이 아쉬운 대학생에게 돈 쓰는 일은, 그게 설령 내가 쓰는 돈이 아니라 할지라도 흔쾌히 승낙하기에는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산책은 좀 달랐다. 기본적으로 시간에 구애가 없었고, 돈이 들지도 않았다. 그저 걸으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그가 건네는 산뜻한 제안을 좋아했다. 한 학기를 보내며 나는 그와 산책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같은 과 친구와 선배들은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나와 그의 관계는 한 학기 내내 같은 과 선배와 후배 사이에서 발전하지 않았다. 시간이 나면 같이 걷고, 걸으면서 남들보다 조금 이야기를 더 나누는 그런 정도였다.
2학기 중간고사 시험 기간, 나는 거의 매일 저녁을 학교 도서관에서 보냈다. 1학기 때 엉망진창이었던 학점을 어떻게든 올려보고자 했던 마음이 컸다. 그와는 도서관에서 자주 만났다. 내가 공부하고 있으면 그가 와서 인사를 하거나, 내가 자주 앉는 자리로 가면 그가 이미 앉아있거나 하는 식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시험 기간 내내 그와 나는 도서관에 있었고, 그래서 산책을 했다. 어떤 날은 짧았고, 어떤 날은 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걸은 날도, 비교적 많은 대화를 나눈 날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학과에서 사이가 껄끄러운 동기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았을 때는 자리로 돌아와 후회한 적도 있지만, 내 얘기가 남에게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약간은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었고, 그가 종종 들려주는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얘기는 늘 흥미로웠다. 공유하는 취향이 늘어가면서 나를 너무 많이 드러내는건 아닌가 하는 약간의 염려도 있었지만, 어쨌든 산책 중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 유쾌했고, 함께하는 산책은 즐거웠다.
나는 그보다 시험이 하루 빨리 끝났다. 그러니까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마지막 날이고, 그는 ‘아 내일은 혼자겠네’라고 했던 날. 그날, 그는 먼저 집에 가보겠다는 나를 따라 나와 ‘정류장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했다. 극구 사양하는 나에게, ‘아 그냥 산책이나 좀 할 겸’이라고 덧붙였다. 산책이 주는 가벼움 앞에서 굳이 사양하는 모양새도 멋쩍어 나는 그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그는 교문까지 가는 길 중 가장 먼 길을 택해 걸었고, 얼마 가지 않아 어딘가에서 라디오헤드의 creep이 어렴풋이 들렸다. 음악은 2층, 창문을 열어둔 밴드부 동아리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럼이 가끔 엇박으로 튀었지만 제법 들을 만한 연주였다. 그와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가로등 불 아래 벤치에 앉아 그 연주를 들었다. 8시가 넘은 가을밤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그는 ‘내일도 산책하러 만나자’고 말하며 손을 잡았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그와 함께한 숱한 산책들을 떠올렸다. 그저 가볍다고만 할 수는 없었던, 우리의 지난 산책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