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러닝사이

취미로 소비하는 산책

by 메모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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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을 좋아한다. 운동도 좋아한다. 하지만 나에게 운동과 산책은 다른 영역이었다. '운동'하면 뭔가 목표가 있어야 했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오래. '산책'은 달랐다. 아무 준비 없이 나가서 바람 쐬는 가벼운 활동. 기분 전환 정도의 느낌.


산책 삼아 나간 공원에서 문득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 속도가 저마다 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평소 걸음이 느린 편이라, 나도 조금 빨리 걸어볼까? 하는 생각에 빠르게 걸어봤다. 호흡이 약간 흐트러졌을 때, 기분이 괜찮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엔 왠지 모를 낯선 즐거움이 있었다. 늘 보던 벤치, 가로수, 산책로의 굴곡들이 다른 속도로 펼쳐지니 새로운 길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빨리 걷다보니 가벼운 조깅으로 이어졌다. 산책으로 시작했지만 운동으로 마무리가 되었던 날. 그날 이후 조금씩 달라졌다. 산책을 조금 더 일찍 나서게 됐고,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3km가 5km가 되고, 운동화가 바뀌고, 옷도 달라졌다. 준비 없이 나가던 산책엔 점점 준비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이젠 산책 삼아 러닝을 나간다. 집 근처에서, 도심 속에서, 여행지에서. 어디서나 달릴 수 있는 길들이 눈앞에 있다. 10km가 익숙해지자 당연히 욕심이 생겼다. 남들처럼 더 빠르게, 더 멀리.


그렇게 러닝이 산책과 운동의 경계에 있던 시기의 어느 날이었다. 집앞 공원을 뛰던 중에도 계속 시계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페이스가 느린가? 오늘 심박은 왜 이렇게 높지? 케이던스는 유지가 되고 있나? 숫자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해 질 녘에 나가서 어둠 속에 들어왔지만, 노을을 본 기억이 없었다. 주객이 전도된 러닝은 더 이상 산책이 아니었다. 워치 기록은 좋았는데 기분은 별로였다. 아차 싶었다. 그 뒤론 시계를 보며 조바심이 들 때마다 고개를 들고 다시 생각한다. 나는 산책을 나온 거라고.


내년2월, 오사카로 42.195km짜리 산책을 떠날 기회를 얻었다. 당첨 메일을 열었을 땐 신이 났는데, 생각해보니 42.195라는 숫자가 주는 중압감이 크다. 그래도 나만의 산책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대회장의 열기, 낯선 도시의 풍경, 그 곳의 공기를 마시며. 그날의 산책이 벌써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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