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을 의미하는 아이템
매해 다이어리를 샀다. 새해를 잘 보내겠다는 일종의 다짐이었다. 일정을 정리하며 나에 대한 기록을 쌓아가는 일은 나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연말이 되면 서점 문구코너에는 어김없이 다양한 종류의 다이어리가 진열됐고, 그 속에서 나는 표지의 색과 재질, 위클리와 먼슬리의 구성을 살피며 다이어리를 골랐다. 다이어리에 사용할 마스킹 테이프와 새 펜까지 고르고 나면 다가올 새해를 이미 잘 산 것 같이 든든했다.
손에 들어온 다이어리는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다이어리를 채운 빼곡한 글씨는 1월부터 6월까지 그라데이션처럼 줄어갔다. 10월쯤 돼서야 다시 펴본 다이어리, 채우지 못한 빈 페이지들이 '너 올해도 그럴 줄 알았어'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다 쓰지 못한 다이어리는 책장에 차곡차곡 늘어갔다. 연도가 지나버려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지만 쉽게 버릴 수는 없었다. 반 이상 남아버린 페이지가 아까웠고, 남들에게 들키기가 머쓱한 일들이 사이에 종종 끼어있었다. '12월까지 다 쓰는 사람도 있겠지?' 무안한 마음에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내년에는 사지 말까 싶다가도 새해가 가까워질수록 다이어리 생각이 난다. 다이어리를 고르며 페이지를 들춰보는 동안 나는 가장 소소하고 일상적인 다음 해의 나와 만난다. 책상에 앉아 하루를 정리하는 나와 연휴가 겹쳐 길게 쉬는 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나, 음력인 엄마, 아빠 생일이 언젠지 확인하는 나와, 걷기 좋은 계절에 주말이 모자라다며 툴툴대는 내가 그 속에 있다. 새해 다짐을 적어 책상에 붙이는 것보다 나를 더 알아주는 따뜻한 방식. 그래서 새해에는 다이어리를 사지 않을 수가 없다. 끝은 없고 시작만 있더라도, 시작은 어쨌든 다이어리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