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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Apr 22. 2018

4, 3

[03_수필]


 내가 태어난 곳은 곤을동에서 하천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부록 마을. 그 마을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마을이 거로 마을인데 나는 유년기를 그 마을에서 보냈다. 어렸을 때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별도 천에서 주로 놀았다. 개구리나 소금쟁이를 잡거나 물수제비를 뜨면서 놀았다. 깨진 농약병이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한번은 물뱀을 보고 기겁했다. 풀숲에 있는 뱀은 봐줄 만 한데 물속을 헤엄치는 물뱀은 끔찍하게 싫었다. 물이 많이 고여있는 곳을 원남 수라 불렀는데 그곳에 물귀신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왔다. 실제로 그곳에서 익사 사고가 몇 번 일어났고, 사람들은 물귀신이 잡아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위험한 곳인데도 여름이면 아이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4·3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시대였다. 학교에서는 4·3을 폭동이라 배웠다. 어른들이 말하는 4·3은 “그때 폭도들이 사람들을 많이 죽였주.”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훗날 4·3 증언이 이어지고 진상 규명을 통해 밝혀진바 그들이 지칭한 폭도들은 군인과 경찰이었다.

 큰고모네 가족이 4·3 때 돌아가셨지만 내가 그 사연을 구체적으로 접한 것은 스무 살이 넘은 뒤였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시를 쓰는 나이지만 4·3에 대해서 공부하고 4·3 시를 쓴 것은 서른 살을 훌쩍 지난 뒤였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으니 4·3은 망각의 역사였다.

 여름이면 별도 천 따라 내려가 화북 바다에서 놀았다. 헤엄치며 놀면서 그 바닷가에 작은 마을이 있었던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때는 마을 전체가 덤불에 덮여 있었다. 4·3 당시 불에 타 사라진 마을 곤을동은 돌담만 남은 채 풀숲 속에 잠들어 있었다.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면서 뒤늦게 4·3 유적지가 조성되었다. 유적지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죽고 집들은 불에 타 버려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 표지석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 많다.                            


 4·3 시를 쓰기 위해 가장 먼저 고향 마을의 4·3 이야기를 찾았다. 가장 먼저 맞닥뜨린 4·3은 곤을동이었다. 나는 그곳을 거닐며 4·3 이전의 곤을동을 상상했다. 늘 물이 고여있는 땅이라서 곤을동이라 부르는 작은 마을.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다. 물이 잘 나면 사람이 모여 살기 마련인데 역사의 비극으로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곤을동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안드렁물에는 여전히 물이 나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나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그곳을 거닐었다. 까마귀가 후렴 없는 선소리를 매기고 날아간다.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 그 친구가 대답을 해야 골목길인데 부를 사람도 대답할 사람도 없는 마을 길이다.

 곤을동은 제주시 화북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다. 4·3 당시 잃어버린 마을들 대부분 중산간 마을에 위치하는데 곤을동은 해안 마을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그곳에서 1949년 1월 4일 토벌대가 들이닥쳐 모든 집을 불태웠고, 마을 사람들 24명이 목숨을 잃었다.


글쓴이 - 현택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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