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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Jan 28. 2019

남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5_육지에서 온 편지]


 이 글을 읽을 우리는 모두 남은 사람이다.     


 지난 9월, 친구의 부고를 받았다. 알바를 하던 중에 받은 연락이었다. ○○○ 님 본인 부고. 그 단순한 글자가 선뜻 읽히지 않아, 일을 하던 와중에도 휴대폰 화면 안 까만 글씨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퇴근하기 5분 전이었고 교대자가 막 왔던 참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한 손에 든 채 그에게 말했다. 저, 부고를 받아서, 퇴근 시간이 5분 남긴 했는데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요, 같은 말들을 횡설수설 내뱉었던 것 같다. 세계가, 흐릿해지는 것도 아닌, 마치 한 번에 섬광이 터지듯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뇌의 모든 기억이 하얗게 지워지고 ‘○○○ 님 본인 부고’라는 언어만 남았다는 듯.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 장례식장에 가고 주위 사람들을 챙겼던 기억이 난다.     


 10월 즈음에는 상담을 받았다. 과거 이야기, 기억을 더듬어가던 시간, 욕망의 간극을 들여다보고, 상담 선생님의 ‘예후가 좋네요.’라는 말에 안심했던 시간이 있다. 그리고 상담을 2회기 남겨뒀을 무렵, 또다시 주위 사람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흐느꼈다. 그의 죽음이 내 몸을 타고 흘렀다. 상담에 가서 말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의 부고를 받았는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저만 힘든 건가 싶기도 하고. 나는 그날 상담실에서 죽음과 부고, 부재와 애도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상담사는 내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어도 힘들 수 있죠. 그런데 윤정 씨는 과거의 죽음에 대해 충분한 애도 기간을 가지지 못한 거 아닐까요.”     


 부재와 애도에 대해 생각한다. 부재는 불현듯 살아있는 내게 찾아온다. 아름다운 거리의 풍경을 바라볼 때, 문득 떠나간 이들의 모습이 끼어든다. 무방비하게 찾아오는 이미지는,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곧 슬픔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삶이 힘들 때면 그 감정은 곧 죄책감이 되기도 했다. 죄책감은 상황을 마음껏 변주시키고 곧 자취를 감추곤 했다. 그 간극에서 나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세상은 변함없이 굴러가는 것만 같고, 나만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나 싶고, 어디에 천착하고 있나 짚어 봐도 돌아오는 건 슬픔과 죄책감이었다. 슬픔을 느끼려 하면 죄책감이 나타나 감정을 가로막고 죄책감을 느끼려 하면 살아있는 몸이 비집고 내 감정과 싸우는 상황의 반복이었다.     


 멈춤 없이 돌아가는 세계는 우리의 존재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애도마저 지우는 듯했다.     


 충분한 애도란 무엇일까 가끔 자문한다. 그러다가, 이것도 살아남은 나의 합리화가 아닐까 싶다, 가도 얼굴들이 떠오르는 밤엔 여지없이 나는 초를 피운다. 충분한 애도. 아니, 절대 ‘충분’하지 못할, 애도. 살아가는 내내 피울 초, 장면마다 찾아오는 부재. 살아있기에, 항상 슬퍼하지도 못하는 몸, 같은 것들과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말은, 남은 사람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말과도 나란히 놓을 수 있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는 사람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걸 힘겹게 받아들이는 과정과도 겹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어떤 말일까. 어떤 말이 되어야 할까.     


 엄기호 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의 “고통의 곁을 지키는 이에게 곁이 있을 때, 그 곁을 지키는 이는 이 기약 없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관건은 고통의 곁, 그 곁에 곁을 구축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에는 밑줄을 그었다.     


 언젠가 내 벗들은 내게 말했다. ‘네가 무너져 있어도 주저앉아 있어도,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그 말에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때때로 무너져 주저앉는 시간을 여지없이 가진다, 이 부재 앞에. 그러나 내가 그렇게 무너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내게 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 말을, 듣는 사람에서 나누는 사람이 되었다. 고통이 되었다가 고통의 곁이 되었다가 고통의 곁의 곁이 되기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존재하므로. 그러니, “앉아 있어도 무너져 있어도, 괜찮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남은 우리는 각자의 몫을 지고 살아가니.     


 그래서, 남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여지없이 오늘도 초를 피운다. 애도를 위한 애도를 하며.


글쓴이 - 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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