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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ㅣㅇㅓㄱ Apr 28. 2019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면 조금은 돌아서 가도 된다는 것

[4_후기]

 작년 10월 서울의 어느 극장에서 홍상수의 ‘풀잎들’을 보고 나오던 날의 새벽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다소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방금 내가 보고 나온 것은 과연 무엇에 관한 영화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알던 홍 감독의 세계와 상당히 동떨어진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작에서 종종 드러났던 난봉과 위선은 일찍이 자리를 거두었고, 흑백의 화면에는 죽음을 어렴풋이 직감한 영혼들의 무력감만 형형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언젠가 자살을 시도했던 늙은 배우는 갈 곳이 없어 얹혀 살 집을 구하고, 슬럼프에 빠진 남자는 예술을 핑계로써 타인에게 집적댄다. 친구의 죽음을 겪은 두 남녀는 서로에게 저주와 폭언을 퍼부으며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애인을 잃은 여자는 남자친구의 죽음에 관한 추궁에 버거워한다. 모두가 각자에게 다가온 소멸의 징조에 묶여 이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부질없는 발악과 이기적인 회피 끝에서 결국 비루해진다.     


(홍 감독의 작품이 언제나 그러했듯)영화의 화술이 관조적인 태도를 일관해서 그렇지, 추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60분의 러닝타임을 가득 채우는 듯한 극중 인물들은 사실 각자의 전투를 벌이며 절박해한다. 물론 그들이 싸우는 적이란 소멸의 기운 그 자체일 것이다. ‘죽음’의 개념을 실감함으로써 일상의 한구석에선 균열이 일어나고, 그 흠집은 넓고 깊게 퍼져가며 마침내 남겨진 자의 머리맡에 이르기 마련이다. 망자들이 일찍이 사라져 지금 여기에 없는 것처럼, 나 역시 코앞까지 드리워진 죽음의 기류에 휩쓸려 금방이라도 없어져버릴 것만 같다는 불안은 전염성이 강하고 끈질기다. 자살 미수에 그쳐 어쩔 수 없이 살아남은 기주봉과 지인의 죽음에 나름대로 책임을 느끼는 두 커플, 그리고 애인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의심에 힘겨워하는 이유영은 이러한 올가미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정진영의 에피소드와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베테랑 연극배우인 그는 자기 나름의 예술을 스스로의 손으로 집필하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창작 자체에 대한 권태에서 허덕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경우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죽음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지만, 예술가가 예술에 환멸을 느낀다면 그것은 죽음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결국 그는 함께 동거를 하며 자신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줄 뮤즈를 찾지만, 이는 예술을 위한 방법 보다는 살아있는 주검이 되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로써 겨우 찾아낸 핑계거리처럼 보인다.


 홍상수의 세계가 대개 그렇듯, 살아있는 유령들은 결국 한데 모여 술잔을 기울인다. 그 술자리는 겁에 질린 생자들이 비루하게 자위하는 아편굴과 다를 바 없다. 얼마나 취기가 오르던 뇌리에 스며든 필멸의 예감은 머지않아 다시금 그들을 엄습해올 것이며, 그들 역시 언젠가는 사라질 하찮은 존재이므로. 하지만 그들은 술(자리)의 힘을 빌려 그 무게로부터 잠시라도 도피하고자 한다. 너의 죽음은 돌이키지 못하고 나 역시 금방에라도 사라질듯 싶지만, 오늘따라 소주가 달고 가게 주인의 마음씨는 유난히 고우니까. 작가 홍상수가 너그러이 허락한 술판 속에서 누군가는 격렬히 화합하고, 어떤 이는 여전히 혼자인 채 다시금 체념한다. 하지만 그들이 다다르는 영화 속 귀결이 어찌 되었건, 도피처에 머무는 생존자들의 자맥질은 아직까진 행복하다. 내일의 숙취에 죽음의 기운이 일렁이고 있을지라도, 오늘의 만취에서 그들은 생의 박동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이 영화는 불가피한 사라짐을 의식한 예술가의 비관적인 위안, 혹은 천진한 체념에 관한 영화였다.


 “자신도 언젠가 죽을 것도 모르고, 예쁘고 단정하게 놀고 있으니까”. 극중 시종 관찰(혹은 관음)자의 시선을 견지하던 김민희는 지상으로 내려와 마침내 유령들의 술자리에 동참한다. 그들의 발버둥이 재미있음을 깨달았고, 심지어는 흠모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것은 소멸의 그림자 앞에 선 자들의 방황이 비로소 숭고해지는 순간이다. 그들의 전투는 하찮았을지언정 결코 무가치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회피와 자기위로는 결코 올바른 돌파구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부도덕하며,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하다. 잠시 사그라진 고통은 이후 곱절로 불어나 들이닥칠 것이며, 자칫하면 잘못된 선택의 연속에서 괴물이 되기 싶다. 다만 (그것이 외면이든 혹은 내면이든, 아니면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무엇인가가 금방에라도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면, 하지만 돌진해낼 여력이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괴물이 아닌 그저 멍청한 인간으로서만 남을 수 있다면, 잠시 뒤로 돌아 옆길로 새도 괜찮다. 지금의 나는 고되고 절박하기에 그것이 맞는 길이다, 라고 주문을 걸어도 된다. 그래야만 어리석은 너는 비로소 존엄해질 수 있다.


글쓴이 - 고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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