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아이. 여중학교를 나와 어색하기만 한 남자아이의 목소리들 중에
유독 목소리가 저음이었던 남자아이.
같은 팀이 되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라는 팀별 게임 중에 내 눈앞에 멈춰 있던 그 아이의 손가락. 그것을 보고 그 아이가 아니라 그 손가락만 한참 동안 바라보았던 나의 의아했던 표정.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순식간에 휘발되어 같이 지내는 3년 동안 그 아이와 나 사이에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처럼 묻혀졌다. 같은 반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고백을 해도 알고 싶은 아이가 있다고 말한 그 아이에 대한 소문들, 매스미디어라는 같은 부서활동이 있던 어느 날, 내 손이 정말 작다며 자신의 어른 같은 손을 내 손 위에 포개던 아이.
아주 작은 일들이 휩쓸려와 내가 있는 이곳에 조용히 뿌리를 내린 섬처럼 한 계절 떠다니는 기억이 있다.
차갑게 식은 보리차를 먹는 여름날마다 나도 모르게 도착하는 기억이 있다.
그 아이가 진짜 나를 알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것보다 내가 가진 그때의 고민들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
내 안에는 좋은 방향이나 쉬운 방향들을 거부하게 하는 그래서 진짜 마음을 감추게 하는 알 수 없는 나의 마음이라는 걸림돌이 있었다.
칠판에 적힌 그 아이와 나의 이름.
그 많은 독서실 인원 중에 의자를 정리하지 않은 두 사람이 그 아이와 나였을 때 독서실 칠판에 적힌 그 아이와 내 이름이, 내 마음을 들킨 누군가의 소행인 것 같아 섣불리 칠판을 지우지 못하고 한참동안 서서 보고 있었던 나. 그 우연이 만든 여름날의 두근거림들... 그 여름의 기억도 나의 뿌리여서 볕을 보려고 나의 마음의 구석에서 조금씩 이동했다.
이상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평온할 때가 아니라 힘든 순간에 과거로 돌아가 지금에 대해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갖게 한다. 나의 지금을 들어줄 것 같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그때 처음으로 확신한 것처럼.
과거에서 떠밀려온 분실물처럼 어찌하지 못하는 시선의 닿음이 모든 꽃씨가 떠다닌 자국처럼 휘날리고 있다.
간혹 그것 때문에 한 계절 동안 재채기가 이어진다 할지라도 잠시 나의 세상과 함께 내버려 둔다.
기억은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어떤 마음을 존중하는 힘이라서 아직 누군가에게 보내지 못한 마음속에
지금에서야 쓰는 첫 문장을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