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ovie
매번 겪었던 스터디가 그랬듯, 이 그림 스터디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될 것이라 예상했다.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영어 스터디나 취업 스터디조차도 몇 달 만에 흐지부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번 그림 스터디는 꾸준히 지속되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스터디를 향한 우리의 애정과 진심은 더욱 깊어졌다. 일정이 생겨 스터디가 밀리면 보충 날짜를 정해 진행할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스터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풍경도 변해갔다. 처음에는 캄캄한 밤하늘 아래 푸르름 없이 헐벗은 나무들이 가득했던 길이, 어느새 밝은 햇살 아래 푸르름이 가득한 나무와 알록달록한 꽃들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어느 날, 스터디를 마치고 카페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아직도 환한 세상을 보며 언니와 함께 웃었던 순간이 생생하다. 우리가 또 다른 계절을 맞이했다는 것, 그리고 몇 달 동안 꾸준히 무언가를 해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뿌듯했던지. 꾸준히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우리의 스터디는 크로키 위주로 진행되었다. 30초, 1분, 5분 동안 크로키를 한 뒤,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방식이 처음엔 얼마나 긴장이 되던지. 1년이 지난 지금도 첫 스터디 날이 선명하다. 연필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크로키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던 나는 손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이 가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낮은 자존감과 부족한 자신감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언니 덕분에 점점 크로키가 즐거워졌다.
재미가 붙자 혼자서도 연습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재밌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그림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급격하게 능동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스터디 외에도 매일 집에서 크로키를 하며 배운 것을 익혔고, 언니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오답노트를 만들어 꾸준히 연습했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스케치북이 쌓여갔다. 그 개수를 세어보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이 차올랐고, 더욱 재밌어졌다.
몇 달이 지나자 동세를 조금씩 읽을 줄 알게 되었고, 부분보다는 전체를 보는 연습이 익숙해졌다. 구도를 먼저 잡고 형태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 그림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며 최소한의 선으로 최대한의 정보를 담는 방법도 익혔다. 그림을 그저 이미지로만 여겼던 내가, 그것도 하나의 언어이며 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몇 달이 지나 정체기가 왔다. 인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한계를 느꼈고, 권태기가 찾아왔다. 마치 알파벳만 익히고 문장을 만들지 못해 제자리걸음하는 기분이었다. 그 권태기는 빠르게 해소될 수 있었는데, 바로 Next Step을 향해 달려갔기 때문이다. 인체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니 느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 하에, 해부학 책을 구매해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가려웠던 부분이 시원하게 긁히는 기분이었다. 근육과 뼈의 구조를 조금씩 알아갈수록 웹툰 속 캐릭터들의 인체 표현 방식이 보이기 시작했고, 작가들 마다 어떤 식으로 다르게 표현했는지도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걷다가도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게 되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니 그림이 다시 흥미로워졌다.
이 경험은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 준 경험이 된 것이다. 부족한 부분이 생길 때까지 갈고닦고, 부족한 부분이 생기면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 달려가는 식의 배움의 확장은 10살도 되기 전, 처음 영어를 배울 때와 같은 과정이었다. 알파벳을 배우고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익히고 문장을 만들었던 그때처럼, 크로키로 기본을 쌓고 해부학으로 구조를 배우며 한 단계씩 나아가고 있었다. 영어를 공부하다 무언가가 답답하고 불편해지면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 공부했고 그때마다 실력은 금세 높아졌다. 정체기는 곧 도약의 신호라는 걸, 거진 20년을 잊고 살다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그림도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기본기를 익히고, 그것을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이었다. 크로키를 통해 인체를 보는 눈이 생겼고, 동세를 읽는 법을 배웠으며, 이제는 해부학을 통해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덕분에 한동안 잊고 있던 성취의 감각이 다시금 살아났다.
또, 이 경험은 ‘재미’가 얼마나 폭발적인 에너지를 낼 수 있는지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다. 영어 공부가 너무나 재미있던 10대 때,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원서를 찾아 읽고, 미드나 영드를 자막 없이 보기 위해 노력했다. 매일 영어 콘텐츠를 접하며 새로운 단어와 표현을 흡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만큼 무언가를 폭발적으로 확장시키고 성장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20대가 되고, 30대가 되며 그 기억은 먹먹한 감각이 되었고, 점점 잊혔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 감각과 경험을, 크로키가 되살려 주었다. 재미로 폭발적 성장을 이뤘던 그 경험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났고, 그림을 재미있게 공부해야겠다는 답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동시에 그림책을 만드는 여정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남편이 말했던, "어떤 학문을 깊게 배울수록 내가 아는 것이 별 볼 일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말이 피부에 와닿았다. 그림 수업을 들으면서도, 스터디를 하면서도, 나는 내가 얼마나 기초가 부족한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아는 것이 조금씩 늘어나자 보는 눈은 높아졌고, 반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부족함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나며 괴리감에 자괴감은 늘어갔다. 완성도와 밀도 높은 그림 그리기라는 목표치는 점점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떠올라버렸다. 점점 그림책을 다시 시작하려 할 때마다 손을 댈 용기가 부서져버렸다.
그림책을 미루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기초를 쌓는 중'이라는 핑계로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결국 6개월이 지나도록 완성한 그림은 10장도 되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그림들을 보며 창피함과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림책을 만들고 있다고 하기엔 너무 부끄러운 성과였다. 한 달 내내 혼자 이 감정을 간직하다 보니 우울해졌고, 그림을 그리는 것도 답답해졌다. 비 오는 날, 남편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늘 그렇듯, 나를 부정적인 감정에서 꺼내주었다.
"선 하나하나가 그동안의 노력의 결과야.
꼭 완성물이 아니어도, 그동안의 노력이 다 담겨 있는 거야.
개수만 중요한 게 아니야."
그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나는 선 하나를 긋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잊고 있었다. 그동안의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은 짧은 선이 아닌 긴 선을 그릴 수 있는 것이었다. 내 노력을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부정적인 감정이 물러나고 자신감이 다시 차올랐다. 그려야 할 그림이 아닌,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자는 결심이 섰다. 의무감이 아닌 재미로 그림을 그리고 마주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를 공부하듯 하나씩 차근차근 부족한 걸 메꾸며 성장하면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매일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한 장, 두 장, 완성된 그림이 늘어갈수록 나의 저주는 서서히 풀려갔다.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고 리스크를 지기 싫어했던 성향이었으나 도전은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늘 할 줄 아는 범위 내에서만 조금씩 도전을 했다. 그런 도전만 하다 보니, 조금씩 내가 잘하는 것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방법을 잊게 만드는 커다란 단점도 따라왔다. 성공하는 경험만 쌓여가다 보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점점 하던 것만 하다 보니 새로운 것을 어떻게 시작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일이 큰 부담이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새로운 업무를 맡을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라 맡은 일은 반드시 해내야 했고, 완벽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 부담감 때문에 새로운 도전 앞에서 작아지고 움츠러드는 기분이 싫었지만, 극복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그림책을 알게 되었고, 미국에 오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생전 해본 적 없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 너무 낯설고 힘들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조차 막막해서 방법을 찾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디게 나아가는 나 자신을 보며 후회하고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방법을 온몸으로 배우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긴 시간 동안, 나는 또다시 새로운 도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더라도 끝까지 해내는 지금의 나에게, 나는 분명 고마워할 것이다. 지금의 시련이 언젠가 인생의 명장면이 되어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그 명장면을 만들기 위해 나는 결코 날아오르는 날갯짓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깊이 잠겼어도 떠오른 때
쓰러졌어도 벅차오른 때
많은 어제를 지나왔으니 점이 되어버린 출발선에
무모했던 날의 날 데리러
언젠간 돌아갈 거라 믿어.
...
언젠가 마지막 안녕이란 인사 뒤에 나올 음악
시간은 흘러서 이건 명장면이 될 거야"
_청춘만화 by 이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