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주에 걸리다

However, I rose with Resilience

by 이차콜

**다음 글에는 TV 시리즈 <길모어 걸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작년에 미드 <Gilmore Girls> 시리즈를 알게 되었다. 그때 본 로리의 모습이 그 당시의 내 모습과 참 닮아있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공감도 많이 되고, 위로도 많이 받았다.

10대 때부터 저널리스트가 되길 꿈꾸던 로리는 예일 대학교에 진학해 저널리스트가 되기 위한 인턴활동을 시작한다. 인턴을 시작한 회사는 저널리스트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자신의 언론사까지 만든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였고, 로리는 그 사람 밑에서 일을 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날 그 사람으로부터 ‘넌 소질이 없어서 저널리스트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유감이야.’라는 말을 듣게 된다. 평생 저널리스트가 되길 꿈꿔왔고,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저널리스트가 되기 위한 것들로 가득 채웠던 로리는 단 한 사람의 평가로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그 사람의 평가가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로리는 자신은 저널리스트가 맞지 않다는 생각에만 꽂혀 폐쇄적인 사람이 되어 버린다. 주변에서 하는 (아주 중요한) 조언인 ‘그건 그저 수많은 그 분야의 사람들 중 단 한 명의 생각일 뿐’이라는 말은 무시하고, 오직 자신에게 상처 같은 피드백을 준 사람의 말만 맹신해 버린다. 학교도 휴학하고 옳은 말(즉, 로리에게는 불편한 말)을 해주는 엄마와는 척을 저 버린 채 방황하며 살게 된다. 그렇게 몇 달을 저널리스트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은 무시한 채, 자신은 저널리스트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갇혀 살아간다.


이 에피소드를 보는 내내 로리에게서 내 모습이 보였다.


그림책 수업의 마지막 날, 피드백을 가장한 상처 주는 말로 난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수업을 마쳤다.

포기라는 단어는 나의 두려움을 밀어 넣은 창고의 두껍고 무거운 문을 개방하는 빨간색 버튼이었나 보다. 처음 떠올린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수많은 어두운 감정들이 나에게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단 한 번도 그 단어를 떠올린 적이 없었기에 그 명령어가 빨간 버튼을 눌러!라는 것이었단 걸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무차별 폭격을 당하듯 멍하게 황당한 상태로 그 모든 총알을 맞아야 했다. 외면했던 두려움과 외로움과 불암감의 감정들이 나를 덮치며 말 그대로 ‘나 이제 뭐 하면서 어떻게 살지?’라는 생각이 덮쳐왔다. 앞으로 남은 이 기나긴 삶을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 달려가고 있던 것인데, 이게 포기를 해야 되는 거라면.. 도저히 어떤 방법으로 살아가야 할지, 날 지켜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한 생각과 감정들이 뒤섞여 수업이 끝난 뒤 몇 시간을 소파에 가만히 누워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과 함께 그 감정들과 생각들이 쏟아져 내 안에서 사라지길 바라며.


난 눈물의 힘을 믿는다. 그래서 정말 힘들면 감정을 쏟아내고 게워내기 위해 울어버린다. 역시나 이번에도 눈물의 힘은 엄청났다. 한참을 울고 나니, 점점 생각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이렇게 방법을 모르겠고, 이 정도로 막막하고 무섭고 힘들면 포기하지 않으면 되지 않나? 포기하는 건 결국 내 선택이잖아.’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지금 나에게 조언을 빙자해 상처 주는 말을 한 사람은 아주 소수일 뿐이며, 아직 내 이야기를 듣지 않고 보지 않은 무수한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수의 사람들이 하는 말로 내 삶의 방향을 틀기엔 너무 억울했고,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내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로 포기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창피한 일처럼 느껴졌다.

드라마에서 로리는 몇 달을 걸쳐 방황을 하다, 이 사실을 깨닫고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되고 엄마와 화해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틀렸고, 나는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걸 몇 년이 지나 증명하게 된다. 로리처럼 나도 그 분야에서 성공한 한 사람의 말로 몇 년 간 꿈꿔온 그림책 작가를 포기할 뻔했다. 다행인 건, 로리와 달리 나는 방황이 4시간 정도로 정말 짧았다. 그 이유는 어찌 보면 참 단순했다. 당장 내일부터 그림책을 하지 않으면, 나의 하루를, 아니 나의 한 시간조차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너무도 캄캄했기 때문이다. 로리와 달리 나는 나이도 있고, 로리처럼 모든 것을 지원받는 상황도 아니다. 당장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내 시간을 어떤 것으로 채워 넣어 지루함과 외로움을 극복해야 했다. 그래서 포기할까라는 생각에도, 그 분야의 전문가로부터 들은 부정적인 말에도, 그냥 나는 내 갈 길을 계속 가야겠다는 생각이 정말 빨리 들었던 것 같다. 포기하지 않고, 포기를 극복하자마자 로리처럼 나도 몇 년이 지난 후 어딘가에서 그분을 뵙고 ‘나도 그림책 작가가 될 수 있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졌다. 그런 목표가 새로 생겨났다. 아주 자극적이고 동기부여가 확실한 목표였다.


계속 직진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자, 빨간 버튼이 다시 복구되며 나를 숨 막히게 했던 어두운 감정들과 생각들이 다시는 열고 싶지 않은 그 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개운해졌고, 명확해졌다. 그렇게 다음 날, 다시 그림책 더미북을 펼쳐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한 나의 도전은 어떤 저주가 걸려 있었다.

내가 만들어내고 그려낸 모든 것들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 같이 보이고 너무도 부족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주처럼, 한 장의 그림도 완성할 수가 없었다. 몇 달의 노력에도.. 수정하고 바꾸는 일만 일어났지 완성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한심해 보였다. 완성을 해야만 느는 것들이 분명히 더 많은데. 부족하더라도 완성을 하고 넘어가야만 성장을 할 수 있는데, 그 밑단에서만 물장구만 치고 있는 내 현 상태가 매우 불편했다. 나는 그저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예상치도 못한 장벽들과 고난들과 퀘스트들이 왜 이리도 많은 것인지.. 그림책 수업이 끝난 뒤에도 그림 수업은 이어져왔는데 이 마저도 과정과 결과가 좋진 못했다. 저주에 걸려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나. 해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어 자책하게 되는 나. 그리고 그 모습을 답답해하는 선생님. 둘 다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기 확신이 없으니 과제로 더미의 그림들을 완성하는 것도 진도가 너무나도 느렸다. 계속해서 수정하고 수정하며 몇 달간 완성을 시키지 못하였다. 너무 답답한 내 모습에 화가 나고 스트레스도 받고.. 우울감도 더 자주 찾아왔다. 나를 끌어주고 싶어 하는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만 커져갔다. 이렇게 그림책 수업이 끝난 뒤에도 꾸준히 이어갔던 그림 수업도 별 수익 없이 끝이 나버렸다.


그렇게 그 한 해가 끝났다. 그림과 그림책 수업을 받았고, 제대로 현타가 왔고 저주가 걸려버린 한 해였다.


점점 그림책을 만드는 나날들은 나의 성장 스토리처럼 되어가는 것 같다. 단순히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더미북을 완성하여 투고를 하는 것이 아닌, 나의 한계를 뛰어넘고, 나를 부수고 바꾸며 변화해야 하며, 나의 우울과도 싸워내야 하는 그런 성장 스토리 말이다.


이젠 이 나날들이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인지, 나의 성장 스토리인지 잘 모르겠다.

너무 괴롭고 힘든 나날들이 많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게 마냥 싫지만은 않다. 성장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단순하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지나고 난 뒤 변한 내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시작하며 내 안에는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 모든 변화의 끝에 서 있는 지금의 난, 과거의 내 모습보다 지금의 내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든다.


그림책은 어느새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단순히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고 변화하도록 도와주는 든든한 친구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keyword
이전 11화포기해야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