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Failure
그림 수업이 재개되기까지의 한 두 달의 기간 사이 새로운 그림책 수업을 알게 되었다. 그전에 했던 수업은 과제와 피드백 중심의 토론형 수업이었던 반면 이번에 알게 된 수업은 좀 더 이론적인 내용과 방법론을 알려주는 것이 베이스가 된 것이었다. 캐릭터를 어떻게 구상하는지, 아이디어를 어떻게 스토리보드로 옮기는지, 원화는 어떻게 만드는지 등에 대한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 그림책 작가분들을 모셔 강연도 들을 수 있는 그런 수업이었다. 너무나 막연한 상태에서 내 방식대로만 작품을 만들어봤던 경험만 있던 나에게 이런 방법론 수업은 꼭 필요한 수업처럼 느껴졌다. 다른 작가분들은 캐릭터를 만들어낼 때 어떻게 접근하는지, 스토리보드를 만들 때 어떻게 시작하고 완성해 나가는지, 스토리 기획은 어떻게 하는지도 너무 궁금했고, 두 번의 더미북을 완성해 봤음에도, 아직도 그림책을 만듦에 있어 하나하나 사소하게 궁금한 점들이 많이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늘 더미북을 만드는 매 단계마다 항상 ‘이게 맞나?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나?’라는 의문이 가득 차 있었으나 물어볼 곳도 마땅히 없었고, 인터넷으로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에도 한계가 많아 답답함이 극에 달에 있던 상태였다.
그 당시, 그림 수업을 받는 몇 달간 그림책보다는 그림 그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한 시간이 많았었다. 그림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휩싸이며, 그림책보다 그림 실력을 올리는 것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그림책보다는 그림 과제를 하고, 피드백을 받고, 수정을 하고, 진도를 나가고, 복습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서서히 그림책을 놓아버린 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점점 그림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못 만들고 있다는 죄책감과 불안감이 켜켜이 쌓였으나, 막상 시작하려니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날 막아섰다. 목 안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그림책을 만드는 것이 뭔가 불편하고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강제성을 가지고 나를 이끌어 줄 무언가가 더욱 필요한 시기였기도 하다.
수업의 중반부부터 그림 수업과 시기가 겹쳐 약간 걱정은 됐지만, 조급함이 정점을 찍고 있었기에 안 돼도 되게 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또, 미국에 살다 보니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었기에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다. 뭐든 흡수할 수 있을 때 흡수해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도, 해내겠다는 의지도 강했다. 그렇게 그 해 봄, 새로운 그림책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수업을 듣는 기간 동안 모르던 것들을 알게 되는 것에 대한 기쁨, 궁금한 것들을 해결해 나가며 갈증이 해소되는 것에 대한 시원함 등의 기분 좋은 감정들이 날 자극하며 도파민이 마구 뿜어져 나왔던 것 같다.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나와 비슷한 동료들이 생겼다는 것도, 배울 기회가 있다는 것도 너무 감사했다. 매 수업에 열심히 참여했고, 과제도 성실히 해냈다. 이 감사한 기회를 잘 활용하고 싶어 항상 질문할 것들을 준비하고, 하나라도 더 배워가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업의 중반부, 실전 시간이 다가왔다. 더미북을 제작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점점 반대의 상황으로 흘러갔다.
나름 그림 수업을 통해 배웠던 것들을 토대로 열심히 그림을 그려 과제를 제출했는데도 유난히 그림에 대한 피드백이 많았던 것이다. 출판사와의 미팅에서 들었던 그림에 대한 피드백과 겹치는 상황이 계속해서 연출되고 있었다. 매 수업을 들어가 과제에 대한 피드백을 들을 때마다 그 상황과 겹쳐지며 점점 눌러왔던 그림에 대한 두려움이 서서히 올라왔다.
그 당시 “완성도”와 “밀도”에 대한 단어를 정말 많이 들었는데,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덜컥 덜컥 내려앉았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아야 하고, 그걸 찾아서 완성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것들에 대해 완성도를 이야기하시는 건지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물어보고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설명을 해주셔도 나는 그 문제가 인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심 차게 시작했던 수업은 막바지로 갈수록 자신감 하락뿐만 아니라 자존감 하락까지 이어졌다. 그림책에 대한 장벽은 너무도 높았으며, 수작업도 경험이 없는 내가 디지털 툴에 대한 경험치까지 쌓아야 한다는 것에 압박감도 느껴졌다.
해야 할 것들을 우수수 쏟아지는데, 제자리걸음만 걷는 것 같은 내 모습에 절대 가져선 안 되는 지독한 병에 걸려 버렸다.
바로,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는 병이었다.
“완성도”와 “밀도”에 대한 피드백을 계속해서 받다 보니 그게 보이지 않는 내가 너무 답답했고 점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재밌기보다 버겁고 무섭기 시작했다. 이 지독한 병은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게 계속 날 방해했다. 그림책 작가를 꿈꾸는데, 그림을 완성시킬 수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빨리 그림 수업이 재개되어 그림 선생님께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개선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버텼던 것 같다.
시간은 흘러 그림 수업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갑자기 선생님이 사정이 생겨 수업을 못 할 것 같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쿵- 심장이 떨어졌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의지하던 유일한 밧줄이 투둑 하고 끊어져 저 밑바닥 아래로 황망히 추락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정도까지 절망스러울 일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나에겐 정말 절망스러웠다. 그림에 대한 자신감이 한없이 추락한 상태였고, 나를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이런 통보는 너무 절망적이었고, 처음으로 거절당한 뒤에도 애원하며 설득을 해봤던 것 같다. 내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선생님은 시간을 조금 달라고 하셨고, 선생님의 답장이 올 때까지 하루하루를 초조함과 긴장감과 불안함이 가득 찬 상태로 보냈던 것 같다.
안 좋은 상황은 연속으로 찾아왔다. 그림을 이제 시작한 초보자임에도, 그나마 출판사와의 미팅까지 갔었고, 미팅에서도 그림책 스토리에 대한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림책을 놓지 않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그림이 별로면 그림 실력을 높여서 내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었다. 내 이야기는 인정을 받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나마 희망의 끈이었던 그 기획력, 스토리텔링 능력까지도 좋지 않은 피드백을 듣게 되었다. 그때 한 선생님께 들었던 그 피드백은 나에게 너무도 큰 상처가 되었고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림도 별론데, 스토리텔링 실력도 없다면 그림책을 하는 것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며 그림책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 포기해야 되나..?”
그 말을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 지켜줬던 결계가 순식간에 와장창 깨지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며 댐이 터진 것 마냥 엄청난 수량의 우울감이 덮쳐왔다. 압도적인 물살에 휩쓸려 해저 밑바닥까지 끌려가버렸고, 캄캄한 바다 바닥에 가라앉은 것 같이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앞으로 어떤 것을 붙들고 이 백수 생활을, 타지 생활을, 아니 하루를 살아가야 하지?라는 막막함에 삶의 의욕도 사라져 버렸다. 껍데기만 남은 채,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p.s. 나중에 우울감과 관련해 상담을 받았을 때, 이 이야기를 상담 선생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때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을 듣고 나서야 그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 “피드백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피드백이지 내게 상처가 되는 말은 피드백이 아니에요. 그건 상처를 주는 말일 뿐이에요. 피드백과는 다른 거예요.”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그동안 가지고 있던 서러움이 터져 나와 펑펑 눈물을 쏟아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