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ild Layers of Density
새로 생긴 용기와 함께 반갑지 않은 손님도 찾아왔다.
바로 ‘조급함’이었다.
파워 J인 나에게 틀어진 계획은 너무나도 커다란 스트레스였다. 하루빨리 원래의 궤도로 모든 것을 돌려놔야 했고, 계획대로 착착 모든 것이 풀려나가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지했기에 생긴 욕심이었다. 아예 모르는 분야에서 0부터 쌓아가는 경험을 오랜 기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하얀 백지를 채워나가는 것에 수많은 단계가 있음을,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학원을 다니고 나니 봄, 여름이 지나버렸고 어느새 가을이 다가와버렸다. 9월이 되니 미국에 온 게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는 사실에 조급함이 밀려왔고, 빨리 성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미국에서의 하루하루를 즐기지 못했다. 다행인 건, 쉬는 사이 새로운 소재의 이야기가 여러 가지 나왔다는 것이다. 첫 번째 더미북에 갇혀있기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첫 번째 더미북의 소재는 현재의 나에겐 제대로 풀리지 않은 이야기였기에 미래의 내가, 때가 되면 완성시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꾸준히 배우면서도 틈틈이 그림책 수업을 찾아보다 우연히 온라인으로 그림책 수업을 받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라인 수업은 생각도 못했었는데, 예상치 못한 희소식은 캄캄한 지하에 갇힌 나에게 내려온 하나의 빛줄기 같았다. 나의 수호신이 나에게 계속 꿈을 향해 나아가라고 도와주는 기분이었다.
그 해 겨울, 드디어 그림책 수업이 시작했다. 비록 미국시간으로 새벽 5시에 받아야 하는, 3시간 이상 걸리는 수업이었지만, 내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강남에서 받았던 그림책 수업은 그림책을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초록과 같았다면, 이번 수업은 실전을 더 디테일하게 알려주는 것 같아 너무나도 좋았다. 그림책을 어떻게 만드는지 하나씩 배워나갔던 강남에서의 수업과 달리, 온라인 수업은 좀 더 실전 편 같았다. 숙제를 한 뒤, 그에 대한 피드백을 구체적으로 받는 식으로 수업이 구성되어 있었다. 향상심이 있는 나에게 제대로 받아본 피드백은 너무도 소중했다. 좋은 피드백을 받고 싶다는 갈증이 심했기 때문일까,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분의 피드백과 다수의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느낀 생각들을 듣는 그 시간은 너무나도 소중했다. 무언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피드백과 생각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한 자산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쌓은 자산을 수업이 끝난 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그만큼 성장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설레고 행복했다. 피드백을 받고, 그걸 바탕으로 개선하는 것엔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 하는 동지들과 함께하니 배움이 더 확장되는 것 같았다. 늘 혼자서만 작업을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 어떻게 창작을 하고 진행을 하는지가 너무 궁금했었는데, 이 수업을 통해 다른 작가님들의 작업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다른 분들이 만들어온 이야기 씨앗을 함께 키워가는 과정을 통해 나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또,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혼자만 가지고 있던 외로움이 해소되는 것 같아 좋았다.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 조금씩 나아가고 성장하는 기분이 드는 4개월이었다. 덕분에 4개월이란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 안에 하나의 새로운 더미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완성도는 자신 없었지만, 한 번 경험을 해보자는 마음에 2월에 있는 공모전에도 도전해보기도 했다. 인디자인이라는 처음 써보는 툴도 써보고, 한국에 있는 인쇄업체에 인쇄 요청도 해보고. 우당탕탕, 엉망진창이었던 경험이었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을 출판사와 틀어진 뒤 홀로 선 기간 동안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일까, 선생님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 출판사로 더미북을 보냈던 그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잘한 경험 같다.
수업의 막바지에 다다른 어느 날, 선생님께서 수업에 빠졌던 인원들을 위해 보충 수업을 열어주셨다. 3명 정도의 아주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수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적은 인원만 모여서인지 그림책 수업이 끝나고, 평소에 수업에선 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는데, 그때 선생님이 해주셨던 이야기는 나를 구성하는 여러 개의 터닝포인트 중 하나가 되었다.
“여러분, 시간을 흘러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쌓아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내 밀도도 쌓인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더 소중히 여겨지고 조급함도 누그러들 거예요.”
조급함을 안고 살던 그때의 나에게 이 말씀은 큰 울림을 주었다. 정말로 오소소 소름이 돋고, ‘댕~’하는 종소리가 머릿속에 들렸으며, 뭔가 탁- 하고 전환되며 깨닫는 느낌이었다. 평생 나에게 시간은 소모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개념이 확고히 새겨져 있었는데, 시간을 쌓아가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시간에 쫓긴다고만 여겨 늘 조급했고, 시간이 흘러가는 만큼 성장하지 못하는 나에게 질책만 했는데. 그래서 주어진 상황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는데. 이 말씀을 듣자마자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것 마냥, 모든 것이 감사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않고 그림을 배우며 노력하고 있던 내가 보였고, 온라인 수업을 찾아 4개월 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 4시간씩 수업을 받고 노력했던 내가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그동안 내가 쌓아와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는 걸 우습게도 이렇게 깨닫게 된 것이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여겨지니 감사함이 샘솟았다.
생각해 보니, 4개월 동안 작업했던 새로운 이야기도 그림책 실패 후, 미국에 정착하던 초기에 내가 느꼈던 외로움과 고독함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 외로움과 고독함을 마주했던 그때의 나는 너무도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그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간 속에 살아온 나의 행적은 모두 내가 어떻게 마주 하느냐에 따라 선연히 새겨질 수도, 홀연히 재가 되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이는 곧, 시간을 소모하는 개념으로 바라볼 것인지, 누적하고 적립하는 개념으로 바라볼 것인지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어떻게 밀도를 높게 쌓아갈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조급함은 누그러들었다. 조급함으로 흐린 눈 하고 바라봤던 성장을 위한 수많은 태스크들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그리고 그걸 이루기 위해 겪은 경험들이 나 자체를 이리도 성장시킬 줄이야.
참으로 신기하고 소중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