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Failure
미국에 오기 전 진행한 한 차례의 미팅 이후 모든 것이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그림책으로 투고했던 이야기를 동화책으로 바꿔 작업해 보기로 한 것이다.
사실, 처음 그 제안을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림책과 동화책이 서로 다른 장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첫 미팅 자리에서 그 제안을 듣고 나서야 둘의 차이를 알게 된 것이었다. 미팅 직후, 동화책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그림책이 아닌 동화책을 만들 수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얼마나 내 그림이 형편없길래 그림책이 아닌 동화책으로 제안을 주셨을까란 생각에 자괴감도 들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이러한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내 이야기에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이렇게 생각이 들자 자신감이 조금씩 회복되었고 짓밟힌 의욕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또 다른 도전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림책을 동화책으로 확장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림책보다 그림이 적고 글이 더 많은 동화책을 만들기 위해선 16페이지짜리 분량의 그림책 줄거리를 몇 배나 늘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세계관을 확장시켜야 했고, 새로운 캐릭터와 사건들이 필요했다.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작업이라 부담감이 컸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하기로 했다. 미팅 직후 출국까지 남은 2주 동안 부지런히 서점을 돌아다니며 참고할 책을 여러 권 구입했다. 덕분에 미국에 도착 후 호텔에 2주 내내 갇혀 지내는 동안 그 책들을 읽으며 줄거리 구상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파트로 이사 온 뒤, 몇 차례 추가 미팅을 진행했다. 다행히 이야기는 예상보다 순조롭게 풀렸고, 출판사 담당자와의 협업도 즐거웠다. 주고받은 피드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수정작업을 이어갔고, 줄거리는 점점 확장되고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작업은 점점 원래 계획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몇 번의 미팅을 통해 점점 세계관이 커지며 한 권 분량의 동화책이 아닌 여러 권의 시리즈물이 어떨까라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한 권으로 끝낼 예정이었던 동화책이 시리즈물로 확장되면서, 내가 의도했던 방향과는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분명 그림책을 하고 싶었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인 작가인 내가 이러한 기회를 논하고 거절할 자격이 있을까 싶어 출판사의 요구에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너무도 절박했고, 조급했던 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통보가 날아왔다.
더 이상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이유조차 제대로 듣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다. 전혀 예상도 못한 통보에 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몸이 굳으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죄송하다는 이야기만 날아왔고 일방적으로 미팅은 종료되었다. 몇 주 동안 준비했던 자료들을 꺼내볼 새도 없었다. 주변에 출판 경험이 있거나 그림을 하거나, 그림책을 해본 사람이 없어 이 상황이 흔한 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얼굴이 벌게진 채 한 동안 멍하니 노트북 앞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다 들었다. “도대체 난 무얼 위했던 걸까?”, “원하는 요구대로 다 들어주려 했던 게 탈이 난 것이었을까?”, “내가 뭔갈 잘못했던 걸까? 아니면 내 바뀐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뭐가 문제였을까?” 그 간의 시간들을 아무리 돌아봐도 이러한 결말을 예고하는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우니 그날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자, 감정이 폭발했다. 펑펑 울음이 터졌다. 복합적인 감정이 몰려왔다. 처음엔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라는 자책감과 자괴감이, 이어서 황당함과 허망함이, 그 뒤에는 분노와 서글픔이 밀려왔다. 마지막으로는 두려움과 압도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나를 덮쳤다.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첫 실패였다.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아예 없을 가능성은 예상했지만, 진행 중이던 작업이 이렇게 갑작스레 끝나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로 꽤나 깊은 상처가 남아버렸다. 자신감도 자존감도 바닥을 찍었다. 앞으로 이 낯선 땅에서 흘러넘치는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버텨내야 할지, 어떻게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낯선 곳에서 경험한 실패는, 마치 보호막 없는 고독한 야생으로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스트레스를 풀 기회도, 그림책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고 위로받을 기회도 없었다. 내가 받은 상처는 어떻게든 나 홀로 알아서 치유해야만 했다. 아무리 외롭고 아파도 유일하게 내 옆에 있는 남편에게 넘쳐흐르는 이 우울감과 힘듦을 쏟아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 역시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내야 했고,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고군툰투하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징징대고 싶지도 않았고, 남편을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흘러넘치는 모든 감정을 혼자 삭히며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그렇게 상처는 점점 곪아갔다.
낮아진 자존감, 그림에 대한 깊어진 트라우마,
백수라는 현실의 무게, 미래(커리어)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낯선 환경에서 홀로 부딪히고 나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막막함은
날마다 나를 짓밟는 무거운 그림자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한국에서 미리 준비했던 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짧은 기간 안에 환기를 할 수 있게 되자 바닥으로 가라앉은 무거운 기분이 고체화가 진행되기도 전에 건져 올릴 수 있었다. 강제로라도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하고, 새로운 관심사(영어)에 몰두하다 보니 점점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 것이다. 실패를 수용하게 되었고, 다시 나아가보자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 그림책을 마주하고 시작하는 것은 무리였다.
한동안은 그림책과 거리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나 회복되는 그 기간은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고, 구글링을 하여 괜찮아 보이는 그림을 배울 시설을 몇 군데 찾아냈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가진 학원이 아닌 성인 대상 취미반과 같은 곳이었지만 한 번도 그림을 배워본 적이 없는 나에겐 이 조차도 감사한 기회였다. 그렇게 그 해 여름, 오일파스텔 수업과 습식재료를 활용하는 두 개의 여름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어학원을 갔고, 주에 두 번 미술학원을 다녔다. 몸이 바쁘니 상처는 자연스레 잊혀 갔다. 배움은 갈증을 조금씩 해소해 주었다. 그렇게 그림책 작업을 멀리했던 몇 달 동안, 그림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되었고 조금씩 그림에 대한 자존감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어학원이 끝나가기 한 달 전인 8월 무렵, 이젠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멀리 던져두었던, 실패로 끝나버린 동화책 자료들을 다시 펼쳐 보았다. 놀랍게도, 이제는 그 작업물을 마주해도 더 이상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의 목표였던, 동화책이 아닌 그림책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