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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결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2)

New Phase

by 이차콜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그날이 와버렸다. 정말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출국 일자가 몇 달이나 밀린 덕분에 친구들과, 가족들과 충분히 작별 인사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작별인사에 충분함은 있을 수 없었다. 몇 달을 이별을 준비하고 인사를 했다 해도 어찌나 슬프고 아쉽고 마음이 저리던지.. 매일 밤 눈이 퉁퉁 부운채 잠에 들었던 것 같다.

그 마음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 장만한 신혼살림도 즐거운 추억을 함께한 차도 모두 처분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첫 신혼집에게 작별을 고해야 했다.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한 곳에서 1년 이상을 살아본 적이 없던 나에게, 1년 넘게 살았던 이 신혼집은 의미가 컸다. 이 집에 살면서부터 내 삶에 행복함이 가득했었고, 처음으로 안정감과 평온함을 느껴봤는데.. 정말 많은 추억이 생겨버린 그 집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제일 섭섭하고 서운하고 슬펐다.


드디어 출국 날 당일.

해가 뜨기도 전, 서울역에 있던 호텔에서 공항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공항에 가까워질수록 해가 떠올랐고 아침 해가 밝게 떴을 때, 아침 해로 가득 찬 인천 공항에 출국장에 도착했다. 출국수속을 받고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통화를 한 뒤, 또다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인턴생활 이후 6년 만이었다.



이렇게 내 인생의 또 다른 Phase가 열리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설렘은 없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일과 함께,

낯선 사람들과 살아갈 날들이 사실은 매우 두려웠다.


정말 다행히도, 출국하기 한 달 전, 출판사와 미팅을 통해 길이 열린 채로 미국으로 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낯선 분야를 홀로 낯선 곳에서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막막했다. 이젠 플랜 B도 없는 것 아닌가. 플랜 B도 없는 도전, 절벽 끝에 내몰려진 도전은 처음이라서 압도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에 휩싸여 미국으로 향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잠도 오질 않았다.


잠도 오지 않고, 뒤숭숭한 차에 별이나 볼까 싶어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별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나라도 보일까 싶어 집중하던 그때, 희뿌연 연기 같은 것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의식적으로 산과 구름인가.. 했다가 지금 차가 아닌 비행기를 타고 있음을 깨닫고 산과 구름일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구름도 아니면 대체 저 희뿌연 연기는 무엇일까. 그 정체가 너무도 궁금해졌다. 무엇일까 고민하며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데 점점 희뿌옇던 연기가 녹색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녹색 빛은 휘인 휘잉, 출렁출렁 대며 찬란하게 퍼져나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생각에 현 위치를 찾아보니 알래스카 상공을 날아가는 중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알래스카 상공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오로라였다.


비행기에서 오로라를 보다니!! 오로라는 점점 더 퍼져나가더니 찬란하게 빛을 냈다. 남편과 함께 생애 첫 오로라를 보며 얼마나 행복해했던지. 의도치 않게 내 버킷리스트 하나가 이뤄진 것이다. 미국생활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던 나에게 오로라는 설렘 한 방울을 떨어트려 주었다. 비록 한 방울이었지만, 그 파장은 일파만파 퍼졌고, 미국 생활에 대한 생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 같은 오로라 덕분에 내 새로운 Phase가 점점 기대되고 설레기 시작했다.


미국에 도착하고 회사에서 준비해 준 레지던스형 호텔에 머물렀다. 도로가에 있는 호텔이라 차가 없는 나는 호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호텔에 갇혀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식당도 없어 무언가를 먹기도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오로라의 영향일까, 이런 상황에도 답답하고 두렵기보다 감사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긴 상태에서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 고여버린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내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우울할까. 다행히도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감사하며 이 시간을 보내보자.’ 이런 마음이 들며, 나도 내 시간을 버리지 않고 알차게 살기 위한 투지가 불타올랐다.


남편이 출근을 해 있는 시간 동안엔 나도 호텔 로비로 내려가 그림책을 어떻게 동화화 할지 고민하고 다른 더미북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출판사와 계속 메일을 주고받으며 작업을 이어갔다.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일을 하며 작업을 할 때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 스토리의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감사한 경험을 쌓아가며 나의 일을 해내다 보니 어느새 호텔에서의 생활이 2주가 지나버렸다. 즉, 미국에 온 지도 벌써 2주가 지난 것이다. 그리고 우린 드디어 호텔 생활을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호텔에만 갇혀 지내는 나를 위해 힘써준 남편 덕분에 다행히 2주 만에 아파트를 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를 구해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한국에서 보낸 가구들, 옷들이 하나도 도착하지 않아 호텔보다 더 불편한 생활이기도 했다. 아무 가구도 없는 텅 빈 집에서 가구가 올 때까지 한 달 이상을 버텨야 했던 것이다. 미국 집은 너무나도 추웠고, 보일러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미국식 히터는 너무나도 불편했다. 급하게 에어매트리스를 사서 잠을 청했고, 빌트인 아일랜드 식탁에서 밥도 먹고 작업도 하며 살아야 했다. 정말 불편함의 연속이었던 하루하루였다.


평온했던 삶이 무자비하게 깨져버렸다. 연락할 사람도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텅 빈 집엔 편히 쉴 공간도 없었다. 모든 것이 스트레스고 힘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일수록 내 현 상황이 소중하고 감사하게만 느껴졌다. 만약 하고 싶은 일도 없이 계속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둔 채 미국을 왔다면 어땠을까?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렇게 불편한 상황에도 하루하루가 기뻤고 행복했다. 동화책 작가로의 미래가 다가온다는 생각에 매일이 설레었다.








그러나 미국에 온 지 한 달이 뒤, 그 미래는 '곧'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출판사와 함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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